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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미 Nov 30. 2022

반갑고도 반갑지 않은

허술한 하루

         

저녁 6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안전 안내 문자’가 왔다. 오늘 밤 9시부터 한파 경보가 있으니 동파 대비와 화재 예방에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자를 받고부터 학원도 급격히 온도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을 끝내고 학원 청소를 끝냈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놓으려고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시험공부한다고 스터디 카페에 가 있는 큰딸이 걱정되었다. 딸이 공부하고 있는 스터디 카페 앞에 차를 대놓고 딸에게 빨리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내가 데리러 왔다는 문자를 받고 딸은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딸은 학원 마치고 가서 4시간 끊어 들어갔는데 2시간밖에 못해서 돈이 아깝다고 했다. 돈은 좀 아까워도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니 딸만 두고 올 수가 없었다. 딸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니 걱정하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이번 주는 남편이 야간 조이다. 내가 퇴근해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남편은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내가 몰고 온 차를 타고 바로 출근한다. 오늘도 미리 도착 메시지를 보냈더니 남편이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있었다. 차를 남편에게 주고 딸과 나는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남편이 출근 전에 집 앞에 도착해 있는 택배들을 현관 앞에 들여놓은 것이 보였다. 생필품이 한꺼번에 떨어져서 주문했더니 며칠 전에 주문한 것들과 함께 현관 입구 가득히 쌓여 있었다. 날씨도 추우니 집에 가서 빨리 씻고, 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득 쌓인 택배 상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오늘 아침까지 다 쓰고 통을 비워버린 샴푸와 바디용품은 당장 급한 물건이었지만 피곤한 기분에 괜히 심술이 났다. 쌓인 택배 속에는 얼마 전 주문한 책들도 있었다. 비닐에 포장되어 온 물건, 상자에 포장되어 온 물건 각각 분리하고, 종이는 종이대로 비닐은 비닐대로, 버릴 쓰레기는 쓰레기대로 분리하여 택배를 정리했다. 한 택배 상자 안에는 똑같은 책이 두 권이나 들어 있었다. 혹시 잘못 배달된 건가 싶어 주문 내역을 살펴보니 역시 내가 잘못 주문한 것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택배를 모두 정리하고 나니 30분이 흘러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 택배를 정리했다고 해도 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내일의 수업 준비가 남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끝나지 않으면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게으른 생각이 들어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고 싶어 진다. 그래도 오늘의 할 일은 오늘 해야 한다. 이미 지쳐 누워있는 마음을 일으켜 씻고 책상 앞에 앉았다. 반갑고도 반갑지 않은, 산처럼 쌓인 택배들을 정리하고 나니 곳간이 채워진 듯한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택배 정리할 때는 그렇게 귀찮고 하기 싫더니 꼭 놀부 심보 같다.          


누구에게나 허술한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그 허술한 부분에서 운 좋게 인생의 금광을 발견하기도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하고명곡이나 명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니 누군가 허술한 채 지내더라도 손가락질하거나 우습게 보지 말자.

모두가 완벽한 인생을 꿈꾸기에 바쁘게 움직이지만허술한 인생만이 가진 재미가 있다.

다 갖춰지지 않아도완벽하지 않아도그 빈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니 거기,

오늘도 완벽하려고 애쓰는 당신에게 전한다.

하지 않아도 될 일들에 치여 지쳐 있다면이제는 그 꼼꼼함을 잠깐 내려놓고,

허술함이 선물하는 행운을 맛보는 건 어떨까.

오늘도 나는 허술해도 괜찮은 당신을 응원한다.     


전승환 <나에게 고맙다중에서          


전승환 작가의 글처럼 빈틈이 많아도 잠시 내려놓고 허술함이 선물하는 행운을 느껴본다. ‘아’ 몰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잠깐의 마음의 도망, 잠시라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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