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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1장 괴물 아버지. 아버지의 입원, 그리 서울로

아버지의 입원그리고 서울로     

  

  어머니가 가출 후 집에 돌아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놀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생겼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집 앞에는 하얗고 네모난 차가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차였다. 저건 무슨 차일까? 사람들 틈에서 초조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서울에 사는 외삼촌이 어머니 옆에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차 안에 아버지가 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불만에 가득 차 보였다. 아버지 양옆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엄마, 아빠 어디 가?”

“아빠 병원 가신다.”

“무슨 병원?”

“이따 얘기해줄게.”

나는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인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치 넋이 나간 듯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가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 간호사들이 아버지를 제압하자 유순해졌다고 했다.

  잠시 후 차가 떠났다. 나는 그때까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허 선생이 병원에 가는구먼.”

“알콜 중독이라잖아.”

“그게 병이었구먼 그래. 그저 술을 좋아하는 줄만 알았지.”

“우리 같은 촌사람들이 그런 걸 어떻게 알어?”

“선화 엄마가 똑똑한 거지 뭐야. 그 병을 알아 갖고 왔으니.”

나는 알콜 중독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그제야 아버지가 병원에 강제로 입원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가출했을 때 어디선가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 외삼촌과 의논해서 아버지의 입원을 몰래 준비했다. 말이 입원이지 퇴근하자마자 아버지는 곧장 병원으로 납치되듯 가 버렸다.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입원할 리는 만무했고, 당시에는 강제 입원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아버지가 간 병원은 그 유명한 용인 정신병원이었다. 

  얼마 후 병원에 아버지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는 또 하나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버지의 병명이 조울증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외계어같이 들리는 병명이었다. 그 병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 아주 나빴다가를 반복하는 병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대망상을 가진 것도 그 병 탓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단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지나치게 마신 게 아니라, 뚜렷한 병명이 있는 환자였다는 사실은 나에게 충격이기도 했고 한편 뭔가 시원한 발견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픈 사람이었다는.

  아버지가 없는 삼 개월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대로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삼 개월이 지나자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전의 아버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살이 쪄서 날카롭던 얼굴형이 둥그렇게 변해 있었다. 약을 먹어서인지 술을 먹지 않아서 좋았는데 사람이 멍해 보였다. 눈빛이 흐려졌고 말수도 적어졌다. 그런 아버지 모습이 영 낯설어서 술 안 먹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대로 아버지는 술과 영원히 작별을 고한 줄만 알았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둘기호 기차가 영등포역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 기차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 문 옆 좁은 공간에 내내 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열린 기차 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장관이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역사 건물로 들어갔다. 역사 내부는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표가 났다. 얼굴이 거무데데하고 시골티가 잔뜩 묻은 여인네들은 머리 위에 보자기를 이기도 하고 손에 짐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을 맞이하는 서울 사람들은 얼굴이 하나같이 하얗게 보였다. 서울의 해는 시골보다 더 뜨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이구, 오랜만이여!”

  “잘 오셨습니까? 무슨 짐이 이리도 많아요?”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말이 들려 왔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선화야!” 

서울에 살면서도 시골 사람처럼 얼굴이 검은 외삼촌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삼촌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우와! 언제나 영등포역을 나설 때면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역사 안도 그랬지만 역 광장이 이렇게 탁 트이고 넓을 수가! 내 가슴은 흥분으로 터질 것 같았다. ‘서울이야, 서울!’ 서울의 공기는 시골과 전혀 달랐다. 폐 가득히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는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했다. 나는 한달음에 약간 경사진 광장을 가로질러 차가 다니는 길까지 내달렸다. 

  서울은 내게 동경의 장소였다. 내가 본 서울이라야 고작 영등포 일대가 전부였지만, 내게 서울은 모든 게 신기하고 흥분을 일으키는 도시였다. 방학 때마다 서울에 갈 때면 ‘나도 서울에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직장이 평택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이사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6학년 여름 방학에 외사촌 여동생이 시골 우리 집을 다녀간 후 나는 마음의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애와 지낸 시간이 꿈만 같고 그 꿈에서 깨어난 나는 도저히 하루하루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매일 그 아이가 생각났다.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도, 혼자 산으로 밭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나는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허전한 가슴을 달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여 속내를 감추고 끙끙거리던 나는 마침내 엄청난 방법을 생각해냈다. 

“엄마, 나 서울 가서 공부하고 싶어.”

“서울? 갑자기 왜 서울은?”

“서울 가서 공부해야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 공부하면 서울대 못 갈지도 모르잖아.”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역정을 내시며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야단을 칠 줄 알았다. 그래도 끝까지 졸라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내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날부터 나는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며 서울 노래를 불렀다. 내가 무엇인가 그렇게 집요하게 졸라본 것은 실로폰을 사 달라고 조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생각에 잠겼다. 혼을 내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놀라운 말을 했다.

“우리 서울로 이사 가자.”

“엄마, 정말?”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어머니의 말은 실언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후 일사천리로 서울 이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내 공부도 공부지만, 아버지의 알콜 중독을 고치려면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로 이사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시골 사람들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아버지가 술 마실 기회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또 시골 사람들은 술에 대해 관대해서 아버지가 창피함을 몰라 더 술을 마신다고 했다. 

  이사 갈 곳이 바로 내가 그렇게 꿈꾸던 영등포 외사촌들이 사는 동네였다. 외삼촌 가까이 살면 어머니가 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외삼촌이 어머니를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나는 날아갈 듯이 행복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이 이루어졌으니. 내가 서울에 가서 살고 공부할 수 있다니. 그리도 좋아하는 외사촌 동생과 같은 동네에 살고 싶어서 졸랐다는 것은 끝까지 비밀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당시 아버지는 교사로 18년 근무했었기에 이 년만 더 지나면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두고두고 아까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시 교사로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 아버지가 알콜 중독을 끊어버리게 하겠다는 어머니의 결심이 컸던 것 같다. 시골집도 팔아야 하고 정리할 것이 많았다. 나는 당장 서울로 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중학교에 가기 전에 가야 진학이 수월하다는 이유였다. 속마음은 어서 외사촌 동생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6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자마자 나를 먼저 영등포에 있는 학교로 전학시켰다. 때는 1979년 가을이었다.      

  영등포구 신길동. 우리 가족이 서울에 처음 터를 잡고 살게 된 동네였다. 동네의 경계에는 높고 흰 벽돌 담벼락이 마치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듯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담벼락 너머로 매일 기차가 내는 소음이 들렸다. 담벼락 앞에 길게 난 길에서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그 길 안쪽으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산동네는 아니었지만 80년대 가난했던 전형적인 서울 동네였다. 골목길은 시골 동네의 골목보다 더 좁았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작은 집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기찻길에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제법 큰 길이 나왔다. 그 큰 길가에 외삼촌네 집이 있었다.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외삼촌네 집에서 나는 한 달 정도 함께 지냈다. 내가 좋아하던 외사촌 동생과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나는 나의 유년기를 다 보낸 시골, 그 산과 들판, 개천, 그리고 친구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서울 생활의 황홀함에 빠져들었다. 

  한 달 후 가족이 이사했다. 외삼촌네 집에서 다시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우리 집이 나왔다. 시골에서는 제법 넓은 마당을 가진 집에서 살았지만, 서울에서는 남의 집에 세를 내어 살아야 했다. 주인집은 중앙에 있는 마루와 방 두 칸을 쓰고 우리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왼쪽, 오른쪽에 있는 방 두 칸을 나누어 썼다. 더 큰 왼쪽 방에 부엌이 붙어있어서 그곳이 안방이 되었다. 남자 동생들만 있고 이제 더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나는 처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전학한 학교에서는 처음에 나를 시골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내 짝이 된 남자아이는 산수 시간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배울 때 내게 물었다.

“너 이런 거 알아? 양수, 음수라고 부르지 않고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하는 거야. 시골 학교에서는 그런 거 안 가르치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도 다 배웠어.”

그때 나는 첫 번째 시험을 기다렸다. 그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첫 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6학년에서 일등을 했다. 나도 깜짝 놀랄 결과였다.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고 죽어라 공부했지만, 학년 일등일 줄이야. 시골 학교에서도 늘 학년 2등이었는데.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모두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공부를 잘하던 반 아이들은 바짝 긴장하는 투였다. 짝이었던 아이는 그때부터 공부에 관한 한 내 앞에서 잠잠해졌다. 공부 잘하는 여자아이들은 내게 함께 시험공부를 해서 잘난 척하는 남자아이들을 이기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그 청에 응했고 우리는 매번 시험 때마다 집에서 모여 함께 공부했다. 나는 한번 잡은 일등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매번 분해하는 남자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내 얼굴을 구경하려고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을 기웃거렸다. 

“쟤야, 저기.”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누구냐고 묻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나를 가리켰다. 그 모든 관심을 의식하면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책을 보고 있었다. 우쭐대거나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나의 외모에 관심을 보일까 봐 얼굴을 더 깊이 숙였다. 시골 아이라서 새까맣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깜씨’라는 별명으로 나를 놀리던 아이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학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이 아버지를 호출했다. 하필 그때 왜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시골에서는 아버지가 학교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혹시나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술을 먹고 올까 봐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약을 먹고 있던 아버지는 그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황토색 점퍼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조그만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마음졸였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 “우리 선화가 졸업식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더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걸 알려주려고 아버지를 불렀다는 게 이상했지만, 나는 승리했다는 묘한 쾌감을 맛보았다. 서울 아이들을 이겼다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앞으로도 서울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서울대의 목표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거의 매달 상을 받았다. 운동장에 모여선 수백 명의 전교생 앞에서 이름을 호명받으면 혼자 걸어 나가 단상에 올라갔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뒤돌아 고개 숙여 인사하면 전교생의 박수 소리가 귀에 들렸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나에 대한 뿌듯함으로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비록 그 느낌이 하루 만에 사라졌을지라도 매달 맛보는 그 쾌감에 나는 중독되었다. 어머니의 기쁨과 자랑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나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느꼈다. 일등이 아니면 살 가치가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점검받지도 않은 채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혔다. 성인이 되어 그 왜곡된 가치관이 두고두고 나를 갉아먹고 괴롭히리라는 걸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백수가 되었다.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지만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 그 평화로운 생활이 나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오랫동안 편물 일을 했다. 시골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한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시골에 논도 사고 산도 조금 사 두었다. 커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재테크에 대한 감각이 있었던 분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훌륭한 요리 솜씨도, 타고난 재테크 감각도, 알뜰한 경제관념도 모두 물려받지를 못했다. 

  어머니의 알뜰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 푼도 허투루 돈을 쓰는 법이 없는 분이었지만, 서울에 와서 모든 수입이 끊어졌을 때 어머니의 생활력은 빛을 발했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일 년 정도 어머니는 한 달에 단 육만 원으로 다섯 식구의 생활을 감당해냈다. 주위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당시 물가가 아무리 쌌다고 하더라도 다섯 명이 육만 원으로 서울살이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시쳇말로 ‘똑순이’라고 불리던 그런 사람이었다. 

  생활비를 극도로 아꼈어도 나는 우리 집이 그다지 궁핍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밥을 굶지도 반찬이 한 가지로 줄어드는 일도 없었다.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도 다 살 수 있었다. 물론 새 옷을 산다든가 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더 돈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는다. 돈이 부족해도 다 살아갈 구멍이 있다는 신념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돈이 없어도 집안이 조용하고 평안하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전혀 새로운 생활로 들어섰다.

  그해 겨울, 우리는 같은 동네의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980년이 되어 나는 영등포 여자중학교로 진학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들이 들렸지만 나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바뀌었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었다. 

  중학교에 전교 2등으로 입학한 나는 1등으로 입학한 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기숙이라는 그 친구는 나에게 별다른 경쟁의식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숙이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늘 전교 석차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 나는 일등을 차지했고 일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만 전념했다. 점점 내 꿈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새로 이사한 집은 그 전 집만 못했다. 아버지가 일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안 형편이 더 나빠진 것이다. 그 집에는 변변한 마당도 없었다. 대문을 열면 오른쪽으로 돌아 주인집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이 나왔다. 그 주인집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었다. 왼쪽으로 돌면 우리가 세를 사는 공간이 나왔다. 미닫이문을 열면 곧바로 커다란 부엌이 있었다. 석회와 시멘트로 엉성하게 발라놓아 만든 부엌이었는데 집 전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사용하던 아궁이 대신 연탄을 넣어 불을 때는 부엌이었다. 부엌 한쪽으로는 계단을 올라가 마루를 대신해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엌 오른쪽으로 난 통로를 통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단칸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방이 보통 크기 방 두 개를 합쳐 놓은 것만큼 컸다. 우리 식구 다섯 명이 지내기에 그리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조금 가난해졌다는 걸 실감했다. 집안은 낮에도 컴컴했고 환기가 되지 않아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집안에서는 늘 연탄이나 뭔가 썩는 듯한 냄새가 풍겼다. 아무리 살림꾼인 어머니로서도 어쩔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집안 경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가을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았다고 말했다. 전라남도에 신안군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러 섬으로 된 군이라고 했다. 거기에 장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곳에 있는 중학교 영어 교사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면 그 먼 섬에 있는 학교의 정보를 알아낸 것일까. 나는 사회과 부도를 펴서 우리나라 지도를 살펴보았다. 정말 신안군이 있었고 장산도라는 섬이 있었다. 평택과 서울 외에 가 본 적이 없던 나에게는 그곳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위해 그 먼 섬에 가서 일한다니 아버지가 조금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먹지 않는 아버지와 지내기는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좀 아쉬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곳에서 일, 이년 정도만 근무하면 더 조건이 좋은 육지로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곧 섬으로 떠났다. 이제 아버지가 돈을 버니 생활이 좋아질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버지가 집에 없어도 별로 허전하지 않았다. 어머니만 있으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의 기억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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