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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1장 괴물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서울에 이사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동네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니는 열성 아주머니들이 몇 분 있었다. 신길동에서 여의도는 멀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아버지의 중독을 고칠 수 있다는 말로 어머니를 설득했다. 절에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어머니는 똑같은 열성으로 교회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절보다는 교회에 더 마음이 끌렸던 나는 얼씨구나 하고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이 모두 어머니를 따라 갑자기 기독교로 종교를 바꿨다.

  아버지가 섬으로 떠나시고 나서 어머니는 금요일마다 철야 기도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혼자 섬에서 지내는 아버지가 걱정되어서인지, 곁에서 약을 챙겨줄 수 없어 아버지의 알콜 중독이 다시 재발할까 봐 불안해서였는지 어머니는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금요일 밤이 되면 집을 나섰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철야 기도회를 간 적이 있었다. 밤샘 기도를 하고 어스름하게 날이 밝을 새벽 무렵 교회를 나섰다. 가을꽃이 피어있는 것을 본 어머니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꽃향기를 맡았다. 우리는 무슨 얘기인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여의도 광장을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어느 금요일이었다. 하루 종일이었는지 저녁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날도 어머니가 철야 기도회에 갈 것을 알았기에 나는 같은 동네에 살던 육촌 외사촌 여동생을 불렀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동생과도 꽤 친하게 지냈는데, 그날 함께 우리 집에서 자기로 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동생이 집에 왔다. 10시가 지나자 어머니가 교회에 갈 준비를 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고 비까지 내려서 혼자 집을 나서는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우산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서 어머니를 배웅했다.

“다녀올 테니 잘들 자고 있거라.”

“네.”

신이 난 우리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그날따라 서둘러 나가지 않고 방 문턱에서 우리를 잠시 지켜보았다. 어머니 얼굴은 왠지 근심이 가득해 보이기도 하고 약간 슬퍼 보이기도 했다. 우리를 측은히 여기는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와 육촌 여동생은 어머니가 깔아준 이불을 덮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참 속닥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그날 나는 다소 흥분해 있었다. 사춘기로 막 들어설 나이 때여서였는지 할 얘기가 차고 넘쳤다.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결에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 목소리가 났다. 주인아주머니가 누군가와 함께 무슨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이 깨어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조용해졌다. 별일 아닌가 보다 싶어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할 때 다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며 우리 집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화야, 일어나. 어서.”

방문이 열리며 주인아주머니 얼굴이 나타났다. 서둘러 불을 켜보니 아주머니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 걸 알았다. 육촌 여동생도 눈을 비비며 함께 일어나 앉았다.

“옷 입어라. 어머니가 사고가 나셨다.” 

아주머니 목소리는 차분했다. 순간 내 등골이 오싹해지며 냉기가 흘렀다. 입이 얼어붙어 무슨 사고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지? 많이 다쳤을까? 어머니는 지금 어디 있지?’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나는 겁에 질려서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겨입고 아주머니를 따라나섰다. 동생들은 잠들어 있었다. ‘병원에 가는 걸까?’

  밖은 아직도 캄캄한 밤이었다. 비는 그쳤다. 싸늘한 초겨울의 냉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동네는 조용했고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 밤에 어머니가 사고가 나서 그 현장으로 가는 현실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동네에서 유일한 가게 쪽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그 가게에 불이 희미하게 밝혀 있었다. ‘왜 가게로 가지?’ 여전히 쿵쾅거리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상태가 어떤지라도 말해주면 좋으련만 아주머니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게로 들어서자 가게 주인이 “아이고 어떡해. 엄마가 죽었으니 애들 불쌍해서...”라고 말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에야 나는 엄마가 다친 게 아니라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엄마가 죽었다고?’ 나는 여전히 “진짜예요?”라고 묻지 못했다. 진짜라는 말을 들을까 봐 무서웠다. 잘못 알았다는 말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분명 잘못 안 걸 거야.’라고 생각했다. 가게 주인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상대방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목소리였다. 주인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교회에 가다가 여의도 광장에 들어서는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진짜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모든 현실 감각이 없어졌다. 주인아주머니는 어머니 시신이 지금 한강 성심병원에 있으니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수화기를 받았다.

“아빠...”

“선화야, 아빠가 지금 서울로 갈 테니 병원에 가서 기다려라. 동생들 잘 챙겨라.”

아버지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야속하고 또 야속했다. 전화기에 대고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네.”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인아주머니와 가게 주인이 뭔가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이 꿈결에서인 듯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빗길에 차가 오는 걸 제대로 보지 못했고, 차는 어머니를 친 후 그대로 뺑소니를 쳤다는 얘기였다. 무슨 뉴스에서 들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얘기가 우리 엄마 얘기일 리 없어... 아주머니는 나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왔다. 

“아침에 병원에 가자. 아버지가 병원으로 오실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 사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5시쯤 되었을 때 아주머니가 아침상을 차려서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동생들을 깨웠다. 

“어서 밥 먹어라. 병원 가게.”

동생들에게 어머니 소식을 어떻게 전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상을 차려준 아주머니가 고마웠지만 어떻게 이 상황에 밥을 먹으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숟가락을 들지 않자 아주머니는 “밥 먹어야지.” 하며 꾸짖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몸이 마비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날이 밝자 아주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한강 성심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에 외삼촌과 오촌 아저씨가 와 있었다. 병원 마당에 허름하게 지어진 건물에 빈소가 차려졌다. 어머니 사진이 걸렸고 향을 피우는 그릇이 놓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후쯤 되어 아버지가 도착했다. 섬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 기차를 타고 먼 길을 서둘러 올라온 것이다. 아버지가 올라오자마자 누군가 우리를 시신이 냉동 보관되어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서랍같이 생긴 은색 상자들이 빼곡 들어서 있는 방이었다. 그중 한 상자를 빼내어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다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어머니 얼굴을 보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고 얼어있는 듯 푸른 빛마저 도는 그 얼굴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나는 섬찟하며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 얼굴을 보면서 무서워하는 것이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빨리 그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자다가 꿈에서 그 모습이 나올까 봐 겁이 났다. ‘저건 엄마가 아니야. 엄마는 이제 없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나는 이제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더 이상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냉정해지며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 시간이 흘렀다. 나는 방관자가 되었다. 

  빗길에 차도를 건너는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낸 뺑소니 운전사는 곧 붙잡혔다. 아버지는 육백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합의를 해줬다. 운전사가 고의로 사고를 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장례식 동안 나는 곧 있을 기말고사를 걱정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시험 걱정을 할 수 있는지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고 부끄러웠다. 담임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조문을 왔다. 나는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그게 신경 쓰였다. 아주 슬프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무덤덤한 표정에서 누구도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마치 연극을 하듯이 내가 맡은 역할을 행했다. 

  장례식이 이어지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내가 태어난 동네에 어머니가 사 두었던 선산이 있었다. 그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 앞에 어머니의 묘를 쓴다고 했다. 그곳에 도착한 날은 11월이었는데도 날씨가 맑고 밝았다.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했다. 몇 명의 아저씨들이 삽으로 땅을 깊게 팠다. 땅을 파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나와 동생들, 친척 동생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기다렸다. 땅을 다 파고 관을 구덩이에 내렸다. 구덩이가 땅에 닿자 아버지부터 흙을 한 삽 퍼서 구덩이 속에 던져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든 뺨을 타고 줄줄 흐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야속하게도 내 눈은 바싹 말라 있었다. 

“너도 흙을 퍼서 넣어라.”

나는 삽이 무거워 흙을 조금 담아서 구덩이 속에 던졌다. 이것이 어머니를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서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마치 마음은 주인이 떠난 비어버린 집 같았다. 흙을 다 덮고 봉분을 만들 동안에도 나는 어서 이 과정이 다 끝나기만을 바랐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휴 지독한 년 같으니. 어쩜 눈물 한 방울을 안 흘리냐.”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아닌데... 그래서가 아닌데.’ 지금 저 땅속에 묻힌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사람인데, 나도 왜 눈물이 나지 않는지 몰라 답답한데 너무나 억울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이 야속했다. 좋은 엄마가 아니라서 내가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봐 화가 났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울지 않는 딸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어머니는 서른여섯 기구한 인생을 살다 갔다. 나는 하나님이 왜 어머니를 그렇게 이른 나이에 데려가셨는지 묻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고, 이제 쉬라고 부르신 거야. 이 세상 더 살아봐야 아버지 때문에 계속 힘들 테니까 이른 나이에 불러주신 거야. 고생만 죽도록 하다 떠나간 어머니의 고된 삶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해 시한부 종말론이 떠돌고 있었다. 장례식 후 우리 집에 심방을 온 목사님인지 전도사님이 삼 년 후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 쪽에 앉아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믿어버렸다. ‘그럼 삼 년 후에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러니 그리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속은 세찬 바람이 불어 한기로 가득했지만, 나의 이성은 구명튜브라도 되는 양 그 허황한 말을 꽉 붙잡았다. 

   내가 어머니의 상실을 슬퍼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무의식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동안 슬픔을 차단했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압도되어 내 의식이 해리되거나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방어기제가 작동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현실로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부모를 잃을 때 울 수가 없다. 무서워서 울 수는 있어도 슬퍼서 울 수는 없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모를 잃고 아이가 우는 장면을 볼 때 그 연출은 가짜라고 생각한다. 실제 상황에서 아이는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을 처리할 어떠한 방법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슬픔을 꿀꺽 삼켜버린다. 그리고 소화되지 못한 슬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끝나지 않는 애도를 한다.  

  어머니를 잃은 후 나는 상실에 취약한 사람이 되었다. 친밀하던 관계가 끝나버리든, 익숙했던 장소를 떠나게 되든, 학교를 졸업하게 되든, 어떤 목표를 이루든 뭔가를 상실하면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힘들어했다.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은 매번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는 듯한 경험이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감에 시달렸고, 마음을 어디에 붙들어 매야 할지 몰라 정처 없이 방황했다. 울고 그리워하고 댈만한 기슭을 찾는 조각배처럼 헤맸다. 오랫동안 그 이유를 몰랐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해서, 새로운 상실을 마주할 때마다 이전의 아픔이 재활성화되는 것임을, 나이가 들어서야 정신적으로 심하게 아픈 후에야 알았다.

  어머니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집에 왔는데 놀랍게도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모습 그대로, 인자한 웃음을 띠고 밥을 짓고 있다. 압력밥솥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엄마, 진짜 온 거야?”라고 묻는다. 어머니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엄마, 다시 가지 않는 거지?” 역시 대답이 없다. 나는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어머니는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꿈이겠지? 내가 깨어나면 어머니도 사라지겠지? 그러다가 잠시 후 어머니가 정말 다시 사라져 버린다. 아무 작별 인사도 없이. 나는 예감했던 일이 일어나서 서글피 울기 시작한다. 꿈에서는 목을 놓아 울고 어머니를 부른다. “엄마, 엄마. 어디 갔어? 왜 또 갔어? 갈 거면 왜 다시 왔어?” 그렇게 울다가 잠이 깨면 내 눈이 젖어있다. 꿈에서나마 어머니의 옛 모습을 본 것이 현실처럼 너무 생생하고 어머니가 다시 떠난 게 슬퍼서 나는 한참을 엉엉 울었다. 

  이제는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아버지를 애도한 방식대로 풍선을 불어서 작별 인사를 쓴 카드를 매달아 날려 보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헬륨 가스는 구했는데 풍선을 구하지 못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하지?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하지만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더 이상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만족시키려는 삶을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삶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상실의 파도를 조금은 수월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어머니의 딸이 아닌 나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려고 한다. 이것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기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려 한다. 

  엄마, 안녕. 엄마, 잘 가. 나 이제 엄마 없이 잘 살게요. 이제 엄마 딸 아닌 나로 살게요.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한 이십 년쯤 있다가 하늘에서 만나요. 더 빠를 수도 있고 조금 더 늦을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 안녕. 엄마를 보내도 잊지는 않을게요.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엄마를 보내 드릴게요. 안녕, 사랑하는 나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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