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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2장 소녀가장.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어머니가 떠나면서 내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 나는 가장이라는 강요된 짐을 떠안았다. 그래도 내게는 내 꿈과 목표가 더 중요했다. 아직은 어렸던 나는 그 나이에 필요한 돌봄과 보호를 받지 못했고, 내가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어머니의 죽음 후 처음 든 생각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지?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는 방학이 되어 서울에 남았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채 못되어 우리 집에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중간 정도의 키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퍼져 있고 삼십 대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할머니처럼 머리를 쪽지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우리의 새엄마라고 했다. 새엄마라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알고 보니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큰아버지에게 새장가를 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큰어머니가 아는 동네 여자를 소개해 주었고 그 여자는 우리의 새엄마가 되기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가 끓어올랐다. “싫어, 싫다고! 누구 맘대로 새엄마야?”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고 싶었지만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묵의 시위만 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아버지가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어머니를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어른들이 모두 미웠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서 지낸 건 채 며칠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내 마음은 지옥 같았다. 아버지는 그 여자를 데리고 어딘가를 돌아다녔고 방학이 끝나자 함께 섬으로 떠났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여자가 도망갔다는 말을 큰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다시 폭음을 시작한 아버지는 그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그 여자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체증이 내려간 것같이 기분이 좋았다. ‘그럼 그렇지. 누가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같이 살 수 있겠어?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바보 같은 여자였네.’ 새엄마가 될뻔한 여자가 나타났다 사라진 사건은 별 의미도 없는 작은 에피소드로 끝나 버렸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두어 번 난데없이 어디서 여자를 데려온 적이 있었다. 한번은 이십 대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아버지를 따라 집에 들어섰다. 그 여자는 수줍어하면서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지는 그 여자와 아기가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살 거라고 했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여자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온 것일까. 그 여자와 아기가 가엾기만 했다. 나는 아버지 모르게 그 여자를 마당으로 불러냈다. 여자는 고분고분 나를 따라 나왔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따라온 거예요?”

나는 조목조목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여자의 얼굴은 점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변해갔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여자는 조용히 짐을 챙겨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집을 떠났다. 나는 그렇게 골치 아픈 문제를 잘 해결한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한심스러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중독이 재발하자 아버지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이유 없이 체벌하기도 하고 결근을 밥 먹듯 하기도 했다. 섬에서 큰아버지에게 전화가 와서 아버지를 데려가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섬으로 내려가 아버지 대신 사직서를 쓰고 아버지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18년 동안 아버지가 교사로 해직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살핀 덕분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사라지자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기능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말 그대로 아버지는 내 눈앞에서 폐인이 되어갔다.     

  아버지가 섬으로 떠났을 때 우리 집에 사촌 언니가 왔다. 나보다 불과 여섯 살 많은 아직 이십 대 초반의 언니였다. 큰아버지는 언니에게 우리 집 살림을 맡겼다. 큰아버지가 중학생 한 명과 초등학생 두 명의 조카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사촌 언니였기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언니는 벌써 사회생활 경험도 있고 요리든 뭐든 살림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무엇보다 언니와 나는 마음이 잘 통했다. 어머니를 잃은 후 언니가 내 곁에 있었기에 완전히 버려졌다는 느낌 없이 그 시기를 지낼 수 있었다. 

  우리는 신길동을 떠나 망원동으로 이사했다. 망원동이 2020년대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될 것이라고는 당시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삼 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동생과 함께 수십 년 만에 망원동을 찾아가 보았다. 차로 몇 번을 돌아도 우리가 살았던 집들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대충 여기쯤이었겠구나 싶은 장소만 확인했다. 망원동에서만 네 번을 이사했는데, 첫 번째 살았던 곳은 복개천 근처에 있는 연립주택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형태의 연립주택으로 가운데 마당 비슷한 공유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사 층 짜리 주택을 지었다. 한 연립주택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해도 오고 가며 자주 부딪히곤 했기 때문에, 몇 년 살다 보면 대략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다. 그 주택에 TV 드라마에 가정부 역으로 자주 출연하는 탤런트가 살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 사이에 화제가 되곤 했다. 

  이사한 집의 주인은 젊은 부부였고 그 부부에게는 연경이라는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다. 요즘이라면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될 정도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인형같이 예쁜 아이였다. 그 아이가 하하 웃으면 온 세상이 행복으로 넘실대는 것 같았다. 연경이는 처음부터 나에게 호감을 보였고 우리는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아이는 매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우리는 늘 함께 여러 놀이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체형이 좀 통통한 편이었지만 미인이라 할 수 있었고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마음씨 착한 주인아주머니는 사촌 언니와 찰떡궁합이 되었다. 살짝 앞머리가 벗겨져 양옆으로만 머리칼이 많았던 주인아저씨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 자주 나를 웃겨주곤 했다. 

  주인집은 큰 방을 썼고 우리는 나머지 방 두 개를 썼다. 아버지와 남동생들이 방 하나를, 언니와 내가 다른 방을 썼다. 언니와 함께 방을 쓰며 이야기를 많이 나눠서인지 나는 어머니의 부재를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았고 별로 외롭지도 않았다. 이렇게 언니와 어른이 될 때까지 쭉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음식을 해주고 빨래하고, 옷을 사주고 병원에 데려가는 등 어머니가 했던 모든 일을 했다. 나에게 언니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대신한 존재였다. 어머니를 잃은 허전함이 언니의 존재로 어느 정도 채워졌다. 언니도 어린 나이였는데 어떻게 사촌 동생들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는지 너무 어렸던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너무 힘이 들었던지 언니는 일 년 만에 우리 집을 떠났다. 그리고 또 다른 사촌 언니가 대신 왔다. 먼저 왔던 언니의 언니, 그러니까 제일 큰 사촌 언니였다. 그 언니도 주인아주머니와 잘 지냈다. 그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소개해 준 형부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언니가 형부를 만나러 갈 때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젊은 남녀가 연애하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것이다. 언니가 결혼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데 괜히 내 마음이 설렜다. 나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할까. 막연하게나마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공상했다. 그는 완벽하게 나를 이해하고 나와 모든 면에서 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떠났지만 사촌 언니들과 연경이 덕분에, 그리고 소녀다운 공상 속에서 나의 중학교 시절이 흘러갔다.      

  나에게 사춘기가 있었을까. 사춘기가 부모로부터, 특히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과 개별화를 추구하는 시기라면 나에게 사춘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로부터 독립해야 할 존재 자체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권위도 갖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독립을 추구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었는데, 그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내가 어머니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사망 후 나는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독립적인 청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독립성은 강요된 것이었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나는 독립성과 의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독립적이기도 하고 지나칠 정도로 의존적이기도 한, 두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만을 의지하고 독립적으로 살아와서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거꾸로 점점 의존적으로 되어간다. 청소년기에 의존에서 독립으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발달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들은 엄마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어떻게 엄마와 싸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게 엄마라는 존재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였다. 그 권위에 도전하는 친구들이 이상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였다. 친구들이 자연스러운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차원에서도 내게는 사춘기가 없었다. 그런 질문은 나의 의식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저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 마음에 여유 공간이 너무 적었다. 나는 매일 매일 학업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했다. 자주 다가오는 시험은 내 생각이 다른 데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었다. 오로지 공부와 미래의 목표인 대학이 내 의식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어른들에 대한 비판과 약간의 경멸적인 태도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나에게도 사춘기가 있긴 했다. 나는 선생님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속물적으로 보이는 선생님들은 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돈이나 명예를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을 나는 속으로 얕잡아보았다. 

  어릴 적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무시와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직업을 잃고 자기 삶을 꾸려가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돈을 벌지 못해도 집에서 책이라도 읽든지, 취미생활이라도 하든지, 친구들을 만나기라도 하든지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동네를 떠돌아다니고 쓸데없이 사람들과 다투고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전에는 괴물로 보였던 아버지가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초라한 폐물로 보였다. 선생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활만을 할 수 있는지,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고 경멸스러웠다. 겉으로는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속으로 나는 아버지에게 형리같이 가혹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자주 큰 집에 가서도 행패를 부렸다. 그래서 사촌들 역시 아버지를 치가 떨리게 싫어했다. 그런데 그 싫은 삼촌 집 살림을 도맡아서 해야만 했으니. 아무리 사촌 동생들이 불쌍했어도 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언니는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떨 때는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런 언니가 용감해 보였다. 대들다가 언니는 아버지에게 욕을 먹기도 하고 맞기도 했다. 아버지의 행패가 심해지던 어느 날 급기야 언니는 집을 나가 버렸다. 

  내가 중 2였던 여름 방학이었다. 언니도 어머니처럼 한 달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언니가 어디 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언니가 다시 돌아올지, 언제 돌아올지 그것만이 궁금했고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무서웠다. 아버지와 우리 남매들만이 오롯이 남겨졌다. 내 생애 처음 맞이하는 그 상황이 너무나 막막하고 암담했다. 언니가 집을 비운 한 달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장 끔찍했던 시간이었다. 밥은 어떻게 해 먹었는지, 빨래는 누가 했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두 가지 사건이 선명히 내 기억 속에 박혀있다. 

  매우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정동 유원지로 놀러 가자고 했다. 어렸을 때 온 가족이 함께 놀러 간 기억은 지금은 에버랜드가 된 용인 자연농원을 갔던 것이 전부였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느낌만 남아있는 걸 보니 그날에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느닷없이 정동 유원지에 가자고 하는 아버지는 이미 술에 조금 취한 상태였다. 그 상태로 놀러 간다면 그곳에서 술을 더 마시고 만취가 될 게 뻔했다. 당연히 가기 싫었지만 안 가겠다고 할 수 없었다. 

  망원동에서 정동까지 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이미 우울한 날이 될 것을 예감한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동생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쩌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놀러 가는데 먹을 것도, 갈아입을 옷도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였다. 물놀이를 하는 곳이라는데 이런 기분으로 무슨 물놀이람. 가는 내내 불안하고 우울했다. 

  정동에 도착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여서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가족 단위로, 친구끼리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즐거워 보였다. 산 아래 암벽 같은 것이 있고 물이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은 웃통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놀이하는 동안만큼은 동생들도 아무 생각 없이 신나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물에 발만 담근 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해하며 눈으로 아버지와 동생들을 쫓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동생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그곳에서 술병을 사들었다. 그리고 혼자 술을 마셨다. 제발 한 병만 마시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가 만취가 된다면 여기서 어떻게 집까지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구라도 좋으니 아는 어른이 한 명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아빠,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집에 가야 하잖아요.” 나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알았다. 많이 안 마신다.” 이미 얼굴이 붉어진 아버지는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더 이상 술을 마시지는 않았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물놀이하는 동생들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앨범을 꺼내 보면 그날 동생들의 사진이 있다. 물속에 나란히 서서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사진에 찍힌 동생들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가장 슬펐던 가족 여행으로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이후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언니가 없는 동안 아버지의 폭음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지옥 같았다. 어릴 때 어머니가 계셔서, 그 후에는 언니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었는지 실감이 났다. 나는 이 세상의 온갖 불행을 다 짊어진 기분이었다. 이 시간이 어떻게 끝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집에 머물러 있었던 건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동생들 때문이었다. 나 혼자야 어디든 가서 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들까지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보육원에라도 가고 싶었다. 그곳이라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밖에 나갔던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왔다. 주인 가족도 집을 비웠고 동생들도 놀러 나가 집에는 나뿐이었다. 아버지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언니와 내가 지내는 방에 들어가더니 마구 언니 욕을 하면서 언니 옷을 옷장에서 꺼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한 채 겁에 질려 아버지가 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언니 옷을 다 꺼낸 후 베란다 창문을 통해 하나씩 옷을 밖으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다 없애 버릴 거야.” 아마 돌아오지 않는 언니에게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옷을 다 내던진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더니 쌓여있는 옷에 불을 붙였다. 연립주택 마당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옷가지는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아버지의 그런 기행을 처음 본 나는 경악했다. 이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옷을 타 태운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면서 부엌으로 가더니 과도를 손에 집어 들었다. 머리가 쭈뼛해졌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일까. 아버지가 칼을 잡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보아왔다. 그때마다 별일 없이 끝났지만 나는 그 광경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큰일이 터지겠구나. 아버지가 누군가를 해치고 경찰에 잡히고 감옥에 가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따라와라.” 아버지는 무서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자석에 끌린 듯이 아버지를 따라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 두려웠다.

  아버지는 과도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차가 다니는 큰길로 향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택시를 멈춰 세웠다. “타라.” 아버지가 택시 앞좌석 문을 열었을 때 주머니에 있던 과도가 땅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다시 과도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택시 운전사가 그 모습을 보았다. 그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승차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산!”이라고 말했기 때문일까. 서울에서 오산까지 택시를 타고 가다니 그런 횡재를 놓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에 가려고 하는 것인지 알아챘다. 큰 집이 오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가끔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술 냄새를 풍기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큰 집에 가서 아버지가 무슨 행패를 부릴까. 저 칼로 누구를 어쩌려는 것일까. 나는 큰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공포에 몸이 굳었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끔찍한 예감에 시달렸다. 

  큰 집 앞에 택시가 멈춰서자 아버지는 엄청난 요금을 지불하고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큰 집 대문으로 들어섰다. 내가 따라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큰 집 문 옆에 서 있었다. 안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나와! 오늘 다 죽여버린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몸을 돌려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도망친 것이다. 한참을 뛰다 보니 동네에서 벗어나 논이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아버지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논길을 배회했다. 무슨 일이 나면 어떡하지. 나는 혹시라도 경찰차가 나타나지는 않는지 동네 쪽을 바라보았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빌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얼마나 그곳에 있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석양이 물들고 저만치 보이는 집들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지금 큰 집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 조금 더 있으면 날이 완전히 저물 것이란 생각에 나는 천천히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보게 될 광경이 과연 무엇일지 무섭고 섬뜩했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큰 집에 다가갔는데 아주 조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도 아무 기척이 나지 않았다. 잠시 마당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방문이 열리며 큰어머니가 나왔다.

“에구, 선화야, 어디 갔었니?”

“아빠는요?”

“큰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시키셨다. 아까 같이 가셨어.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큰어머니가 언제나 이런 일이 끝날까 하는 표정을 짓자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비로소 숨을 크게 쉴 수 있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버지는 병원으로 갔다. 온몸에 긴장이 풀리며 깊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삼 년 만에 다시 입원하게 된 아버지. 이제 몇 달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아버지는 두 번째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삼 년이라는 기간은 공식처럼 그 후에도 매번 딱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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