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지킴이 Nov 28. 2023

2장 소녀가장

소녀 가장이 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큰언니도 우리 집을 떠났다. 일 년씩 불과 이년을 언니들과 지냈지만,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준 언니들의 존재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깨달은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청소년기 내내 나 혼자 가족들을 책임지고 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언니들은 내 정신이 무너지지 않고 계속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돌보고 동생들을 챙기며 우리 가정을 지탱해 주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내가 가정을 떠맡을 차례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소녀 가장이 된 것이다. 

  이년을 지냈던 연경이 집에서 맞은 편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 살게 된 집은 주인이 없는 대신 거의 완전한 지하 셋집이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집과 비슷하게 창문을 열면 머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흙먼지가 날아 들어왔다. 그곳에 사는 일 년 동안 창문을 연 적이 없다. 길에서 서너 계단쯤 내려가면 작은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면 바로 작은 부엌이 나왔다. 싱크대 하나와 수납장, 가스레인지가 부엌에 있는 전부였고 사람 한 명만이 싱크대 앞에 설 수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싱크대 서랍에는 늘 바퀴벌레가 들끓었다. 나는 바퀴벌레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게 휴지로 꾹 눌러 죽이는 데 익숙해졌다. 

  부엌과 분리되지 않은 공간에 한 평이 조금 넘는 작은 방과 역시 변기와 한 사람이 들어가 세수할 수 있을 정도로 좁디좁은 화장실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 방과 화장실 사이를 지나면 비로소 큰 방이 나타났다. 6학년 때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처럼 넓은 방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생들이 지냈고 나는 작은 방에서 공부하고 잠은 큰 방에서 잤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으로 이사를 간 이유를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환기가 되지 않아 집 안에서는 늘 썩은 냄새가 났다. 습기가 항상 차 있어서 공기가 축축했다. 장마철이 되면 길에서 빗물이 부엌으로 흘러들었다. 급기야 집에는 쥐까지 나타나 제멋대로 활보하고 다녔다. 잡을 도리가 없어서 한 마리 정도는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었다. 그 후에 살았던 집들도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지만, 그 집은 최악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꿈에 지독히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집이 보이곤 했다. 들어가기가 싫어서 일부러 학교에 남아 공부하고 늦게 집에 들어가곤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나는 큰 집에 가서 십만 원씩 생활비를 타왔다. 큰아버지가 시골집 판 돈과 어머니 보상금을 관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망원동에서 합정동으로 버스를 타고 가 전철을 타고 수원까지 갔다. 수원역에서 또 버스를 타야 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한 달에 한 번 나는 어떻게 지내는지, 아버지 상태는 어떤지 큰아버지에게 보고했다. 언니들은 가끔 나를 데리고 시장에 가 옷을 사주곤 했다. 

  나는 이제 폭우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받쳐줄 우산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는 습관이 생겼다. 삶은 내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매일의 일상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숙제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삶은 내게 숙제같이 느껴진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해야 할 일처럼 느껴야 성취감이 생겼다. 산다는 게 뭘까, 왜 살까 하는 생각은 내게 사치였다. 가끔 그런 철학적인 질문을 하며 어려운 책을 읽고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친구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지 뭐, 저 애들은 뭐가 저렇게 복잡할까. 나는 인생의 가장 큰 질문들을 유예했다. 

  아버지만 없었어도 삶은 내게 가볍고 즐거울 수 있었다. 동생들과 셋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집안일을 엉망으로 해도 상관없었다. 마음만 편하면 우리에게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에너지가 충분히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것을 방해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보호자가 사라져버렸고 내가 아버지와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내 옆에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책과 공부가 나의 피난처였고 책에서 나는 위로자와 보호자들을 찾아냈다. 

  보살피는 사람, 보호자가 나의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다. 나의 주위에는 늘 내가 신경 써줘야 할 사람, 정서를 보살피고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나도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보호받지 않아도, 보살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이유가 사실 내 자신이 보호받고 싶어서, 보살핌을 받고 싶어서라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되었다. 그 욕구가 채워질 때는 삶이 행복하고 따뜻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혹은 내가 보호하고 보살필 존재가 없을 때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공허감, 삶의 무의미에 시달렸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부작용이었다. 


  내가 집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뛰어난 분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요리를 배우지 못한 것이 나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어디 요리뿐이랴. 어머니는 편물 기술이 있었다. 시골에 살 때는 집에서 기계로 스웨터나 바지, 코트, 조끼 등을 짜서 인근 동네에서까지 주문이 몰려들곤 했다. 어머니는 손으로 하는 모든 것에 솜씨가 좋았다. 어머니의 그런 재능을 내가 물려받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요리를 배웠더라도 아마 잘하지는 못했으리라. 

  언니들도 내게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독학을 해서 음식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김치는 때마다 큰 집이나 외삼촌 댁에서 갖다주었다. 언니들이 가끔 밑반찬을 해다 주기도 했다. 나는 달걀부침부터 시작했다. 어묵볶음이나 소시지 달걀부침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물을 무치는 건 아예 시도도 하지 못했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는 다시다를 넣어서 맛을 냈다. 도시락 반찬은 늘 소시지 달걀부침 아니면 김치였다. 아침에 일어나 후다닥 나와 동생들 도시락을 싸고 학교에 가는 것이 첫 일과였다.

  매일 비슷한 반찬만 하는 것이 고민이 되었다. 어느 날 고깃국을 끓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퍼마켓에 가서 고기를 파는 매장으로 갔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가격이 많이 차이가 났다. 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아저씨에게 “저, 돼지고기 한 근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뭐 하려고?”라고 물었다. “고깃국 끓이려고요.” 그랬더니 아저씨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무슨 돼지고기로 고깃국을 끓여?”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요?” “소고기로 끓여야지.” 아저씨 표정은 내 나이에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내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돼지고기로는 고깃국을 끓이는 게 아니구나.’ 그런 것도 몰랐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그냥 뒤로 돌아 서둘러 수퍼마켓을 빠져나왔다. 그때 당황했던 열일곱 소녀였던 내가 종종 생각나면 그 소녀가 가엾어진다. “그런 거 몰라도 돼,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한번은 막내 남동생이 소풍을 간다며 김밥을 싸 달라고 했다. 나는 공부한다고 동생들에게 소홀했던 것이 늘 미안했다. 이번에 제대로 누나 노릇을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싸본 적이 없는 김밥. 그래도 대충 재료는 무엇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었다. 달걀, 소시지, 시금치, 당근, 노란 무와 김을 사 왔다. 밥을 짓고 재료들을 하나씩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는 김에 밥을 얼마나 깔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거였다. 되는대로 밥을 깔아서 재료들을 넣고 김밥을 말았다. 울퉁불퉁 모양이 영 보기 싫었다. 김이 중간에 터지고 밥이 비집고 나왔다. 어찌어찌 김밥을 다 말고 칼로 썰었다. 제대로 모양이 예쁘게 썰리는 김밥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준비한 양은 도시락에 김밥을 하나씩 넣었다. 내가 보아도 모양이 형편없었다. 다음날 동생은 하나도 먹지 않은 김밥 도시락을 그대로 다시 가져왔다. 

  음식 준비 외에 가장 힘든 일은 빨래였다. 우리 집 살림에 세탁기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네 식구의 빨래양이 많았다. 평일에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토요일에 몰아서 빨래했다. 커다란 붉은 고무통에 빨래를 집어넣고 세제를 넣은 후 바지를 걷어 올리고 들어가 밟았다. 일일이 손으로 빨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모자라서 발과 손이 시렸다. 빨래하면서 내가 왜 이 나이에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억울했다. 다른 애들은 지금 공부만 할 텐데... 나는 시간도 아까웠고 몸이 힘들어 저절로 불평이 나오고 화가 났다. 나의 처지가 너무 서러웠다. 너무 이른 나이에 비자발적으로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경험이 살림하는 데 대한 반발심을 갖게 했다. 주부가 된 후에도 나는 별로 살림에는 흥미가 없었다. 내 속에 있는 열일곱 살 아이가 여전히 살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나이는 사십 사세였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였고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때였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아버지는 세상에 설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우정을 쌓거나 인간관계를 맺는 데 서툴렀던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두자 연락하는 선생님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어딘가 돌아다녔다.

  어느 날 밖에 나갔던 아버지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무슨 종이 꾸러미를 잔뜩 쥐고 있었다. 

“나 이제 일할 거다.”

“무슨 일이요?”

“책 외판원.”

아버지는 방바닥에 종이를 하나씩 펼쳐 보였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자주 들르곤 했던 책 외판원들이 보여주던 그런 광고지였다. 각종 전집류에 대한 광고지를 잔뜩 가지고 온 것이다. 

“내일부터 팔러 다닐 거다.”

아버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의기양양했다. 나는 아버지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책 파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 않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기대하는 마음 반, 염려되는 마음 반이었다. 그래도 일을 해보겠다고 뭔가를 시도하는 아버지가 짠했다.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아침에 광고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부디 아버지가 한 번에 욕심내지 말고 성실하게 일을 하기를 바랐다. 잘 안되더라도 꾸준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하나도 못 팔았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며 생전 안 해본 외판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가여워 보였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허탕이었다. 아버지는 사흘 만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초라하고 약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몇 번의 구직 시도를 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한번은 아파트 경비 일을 한다고 했다. 

“정말 취직이 됐어요?”

“그럼,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더라.” 

“아빠, 할 수 있겠어요?”

“그럼, 할 수 있지.”

아버지는 자신만만했다. 이미 교사를 그만둔 지 오래여서 경비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역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성실해야 하는 일인데, 사람들을 상대하고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는 일인데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채 일주일이 못 되어 아버지는 해고되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무슨 일을 해보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한 해, 한 해 아버지는 말 그대로 폐인이 되어갔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아무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 그런 아버지가 점점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했다. 약을 먹고 있어서 술을 마시는 횟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명절에 친척 집을 방문할 때는 꼭 술을 마셨다. 내 고향인 어연리에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묘소가 있었다. 아직 외가 쪽 친척들도 여럿 살고 있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어연리를 찾아갔다. 

  내가 서울에 첫발을 디뎠던 영등포역에서 수원까지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서 서정리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서정리 시장 근처에 있는 정류장에서 어연리에 들어가는 시골 버스를 타고 논길을 달리면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서정리 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친척 집에 선물할 과일을 사곤 했다. 친척 집에 가면 또 한바탕 소동이 나겠구나 싶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좀 가면 안 되나, 꼭 우리를 데리고 가야 하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나지막한 산을 오르면 선산이 나왔다. 그 산도 어머니가 알뜰살뜰 아낀 돈으로 사둔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당신이 사둔 땅에 묻혔다. 간단히 묘소를 둘러보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 사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며 곧 있을 폭풍을 어떻게 피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이,”

아버지는 누가 그리 반겨준다고 큰 소리로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의 오촌 외삼촌이 사는 집은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마당에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었고, 나무로 세운 기둥과 마루, 창호지를 바른 방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마루에는 이미 친척 아저씨들이 모여 벌써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술을 내오라고 할 판인데 아예 술판이 벌어지고 있으니. 아버지가 고주망태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친척 아저씨들이 원망스러웠다. 

“어, 허 선생. 어서 와. 이리 와 앉아.”

아직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얼마나 심한 술꾼인지 다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술잔을 건네는 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신다고 해도 오히려 말려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마루 구석에 앉아 아버지가 얼마나 술을 마시는지 지켜 보았다. 말릴 수도 없으면서 지켜 보기라도 해야 뭔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가능하다면 말려보려고. 거나하게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를 욕하고 자꾸만 술을 더 내오라고 했다. 이제는 아버지를 말려도 소용없었다. 사람들은 슬슬 자리를 떴다. 결국 아버지 혼자만 남겨졌다. 

  술에 취하면 그날 집에 돌아가기는 다 글러버린 거였다. 아버지는 우리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 동네 아는 사람 집을 찾아다니며 추태를 부렸다. 결국은 오촌 외삼촌이 아버지를 찾아 데리고 와 달래서 재워야 그날의 소동이 끝났다. 해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명절의 풍경이 지긋지긋했다. 명절이 다가오기만 해도 며칠 전부터 우울한 먹구름이 드리워지곤 했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 즐겁게 기억되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장 소녀가장.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