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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2장 소녀가장. 망원동 수해

망원동 수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그 냄새 나고 축축한 지하에서 벗어났다. 새집이 어떤지 잔뜩 기대를 걸었건만 지하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새로 이사한 곳은 망원동으로 들어오는 버스의 종착지에서 멀지 않았다. 담벼락을 따라 죽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길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가면 끝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이층집이었다. 이층에는 주인이 살고 아래층에는 세 가구가 함께 살았다. 말이 아래층이지 반지하는 아니었는데도 거실에 햇볕이 들지 않아 낮에도 컴컴했다. 말이 거실이지 연한 녹색 장판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양말을 신은 채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 슬리퍼를 신지도 않았다. 

  거실 오른쪽 구석에 모두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은 꽤 컸지만, 청결 상태가 나빴다. 그 옆이 내 방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닥이 고르지 않았다. 밑에 돌이라도 깔린 듯 울퉁불퉁했고 한 쪽이 약간 기울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이 좋았다. 그 옆에 있는 큰 방을 아버지와 동생들이 썼다. 거실의 가운데 벽 쪽으로 우리 집과 옆집이 함께 사용하는 꽤 큰 부엌이 있었다. 오른쪽 공간은 우리가, 왼쪽 공간은 옆집이 사용했다. 옆집이 쓰는 방 두 개, 그리고 거실의 왼쪽 벽 쪽으로 세 번째 집이 쓰는 부엌과 방이 있었다. 총 다섯 개의 방과 두 개의 부엌이 있었으니 전체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세 가족은 이 년을 함께 살았지만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각자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도 달라서 서로 부딪히는 법이 없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관심도 없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외에 아이들은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큰 소리를 내도 그들은 항의 한 번 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서로 무심했다. 

  그해 9월 지금도 사람들 기억에 남아있는 망원동 수해가 발생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교회에 갔다가 교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합정동에서 망원동으로 들어가는 도로에서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섰다.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사가 “지금 수해가 나서 더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리세요.”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수해라니? 진상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는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통제된 구역이 나왔다. 사람들 말이 수해가 났고 근처 초등학교에 대피소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동생들이 어디 있을까. 학교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일러준 초등학교로 향했다. 가던 길에 우리 반 친구 집이 나타났다. 그 친구 집은 약간 언덕진 곳에 있어서 수해 피해를 면했다. 친구가 나를 반겼다. 

“무슨 일인지 알아?”

“망원동 유수지가 터졌대. 그래서 물에 다 잠겨 버렸대.”

“내일 학교에 어떻게 가지?”

“삼 일간 학교 안 간대.”

친구가 근심스럽다는 듯, 한편 잘됐다는 듯 얘기했다. 피해를 비켜 간 친구네가 부러웠다. 잠시 그 집에 있다가 학교로 향했다. 

  대피소로 사용된 학교는 높은 지대에 있어서 피해를 면했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교실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교실들을 돌아다니며 아버지와 동생들을 찾았다. 다행히 한 교실에서 아버지와 동생들이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도 그곳에 가서 앉았다. 교실의 책상과 의자들은 다 치워져 벽에 쌓아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구청에서 나눠준 듯한 모포와 담요가 어지럽게 교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가족별로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담요를 깔아 자리를 마련했다. 컵라면과 보름달 빵이 배급되었다. 그곳에 있는 삼 일간 식사는 컵라면과 보름달 빵뿐이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은 집에 있다가 대피하라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너무 다급해서 집에서 가지고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이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 피해 상황이 어떤지 아무도 몰랐다. 교실 안에서는 할 게 없었다. 나는 답답해져 교실 밖을 나와 운동장으로 나갔다. 밖에는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칙칙한 하늘은 무심하게도 세찬 비를 뿌려댔다. 운동장에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고여 있었다. 나는 친구가 빌려준 우산을 쓰고 하늘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끝나버린 느낌, 모든 것이 사라져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싶은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무섭고 서러웠다.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닌데도 나는 우리 가족에게만 닥친 불행같이 느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집에 물건이라야 그리 값나가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게 물에 잠겨 없어졌다면 다시 생활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내게 세상은 이렇게 가혹하기만 한 것일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원망했다. 나한테 너무하신 것 아녜요?

  그때 나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걸 경험했다. 그때부터일까. 나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늘 최악을 상상하고 각오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각오하면 오히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낙관하고 있으면 오히려 뜻하지 않은 재난이 찾아왔다. 그래서 미리 있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상상하고 어떻게 대비할지 각오했다. 그러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생긴다 해도 충격이 덜했다. 어머니의 죽음도, 엄청난 수해도, 그 이후에 생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도 하나같이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측했어야 했어.’라고 생각했다. 마치 예측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예측 불가능성이란 내 안에 내재한 불안에 불쏘시개를 던져주는 것과 같았다. 나는 항상 생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마음의 방비를 단단히 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어떤 상황이 되어도 놀라지 않고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지겨운 사흘이 지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마다 물이 들어왔다 나간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버려진 가구들, 살림 도구들이 길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네는 통째로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형국이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방에 내 키 조금 못되게 물이 찼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렇게나 높이 물이 들어찼었다니.’ 망연자실했다. 폐허가 된 집에서 건질 건 하나도 없었다. 

  아래층에서 생활할 수 없어서 이층 주인은 세입자들에게 방 하나씩을 내주었다. 소식을 듣고 사촌 언니들이 찾아왔다. 온 동네가 일주일 내내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다 들어내고 건질만한 옷가지들을 빨고 널고 법석이었다. 빨래할 게 너무 많았다. 큰아버지가 세탁기를 사 보냈다. 한 통에서 빨래하고 건져서 다른 통에서 탈수하는 방식이었다. 물도 수도를 연결해 계속 넣어주어야 하는 수동식 세탁기였다. 그래도 손으로 빨래하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신기했다.

  알고 보니 이번 수해는 국가적 재난이었다. 망원동에 있는 유수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발생한 인재였는데, 피해 규모가 너무나 컸다. 연일 뉴스에 보도가 되었다. 다행히 비가 그치고 맑은 날씨가 지속되어 길과 집안의 물기가 말랐다. 시에서 구호품이 집마다 배급되었다. 쌀과 이불, 생활용품 등 매일 뭔가가 집에 배달됐다. 재미있었던 건 11월이 되자 북한에서 연탄을 지원했던 일이다. 우리가 북한에서 보내주는 연탄을 때고 살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그 정도로 수해의 피해가 막심했다. 

  아래층 거실에는 전보다 훨씬 좋은 리놀륨이 깔렸다. 세입자들이 비용을 함께 부담했다. 거실이 한결 깔끔해졌다. 이제 양말을 신고 다녀도 더러운 것이 묻어나지 않았다. 방을 새로 도배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 다시 샀다. 옷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써온 일기장을 통째로 버려야 했던 건 가장 아깝고 애석한 일이었다. 수십 권의 공책이 물에 잠겨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내 소중한 기록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때 일기가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유용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활을 시작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일상이 돌아왔다. 그때 알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옳다는 것을. 다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말이다. 가난했던 우리 집 살림에는 그다지 큰 손해가 나지도 않았다. 온 동네가 초토화되어 집마다 복구가 한창일 때 우리만 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피해자로서 연대감마저 느꼈다. 잠을 잘 때면 이웃에서 고함치며 싸우는 소리,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다른 집도 참 힘들구나 싶은 생각에 잠을 뒤척이면서 모두가 이전의 생활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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