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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2장 소녀가장. 학창시절의 영광

학창 시절의 영광   

  

  고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자 시작되었던 학업 성취의 동기는 철저히 내면화되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책과 노트를 붙들고 있는 나를 친구들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공부는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였다. 가정에서 주어지는 안정과 행복의 결핍을 보상할 수 있는 칭찬과 인정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친척들과 선생님들, 친구들은 내가 어른이 되어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내가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유명한 사람이 되든지, 큰 업적을 이룰 것이라 기대하는 듯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아랑곳하지 않는 척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기대가 내 안에 자리 잡아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정도의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학년을 올라갈수록 나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다. 전교 1등을 넘어서 모의고사에서 서울에서 십 위 안에 드는 성적을 올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서울대 정도가 아니라 전국 문과 여자 수석까지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정도까지 높은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학력고사를 망칠 수도 있었기에 끝까지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은 없었다. 그러나 학력고사가 다가올수록 나의 꿈이 현실이 될 그날이 곧 도래한다는 설렘, 낙관적인 느낌이 찾아왔다. 

  문과에서 나와 일 이등을 다투던 경쟁자가 있었다. 나는 모의고사 성적이 늘 고른 편이었고 그 친구는 다소 들쑥날쑥했다. 그런데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서 치른 첫 모의고사에서 그 친구가 모의고사 300점을 넘어버렸다. 그 점수는 학력고사에서 마의 320점을 돌파하는 점수였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300점을 넘지 못했다. 일등을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내가 넘을 수 없는 점수를 그 친구가 넘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 친구가 방학 동안 몰래 과외수업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철저히 과외를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암암리에 과외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도 반 아이 엄마의 부탁으로 일 년 동안 과외수업을 해준 적이 있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소문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과외수업을 받았더라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억울하고 속이 상했다. 집안 형편의 차이가 점수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나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화여고에 다니던 중학교 친구 기숙이에게 엽서를 써서 속상한 마음을 표현했다. 기숙이도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다. 나에게 용기를 주며 너는 해낼 수 있다고 격려하고 위로했다. 기숙이의 위로와 격려로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모의고사 때 나는 다시 그 친구를 이겼다. 그 친구가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또 한 번 300점을 넘었을 때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학력고사에서는 내가 훨씬 높은 점수를 얻었다.

  주위의 주목과 칭찬을 한 몸에 받는 영광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는 더 이상 큰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나는 남들이 보기에 평범한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오랫동안 학업적 성취가 곧 나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학창 시절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다. 평범해진 나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동창생들을 만나기 싫어한다. 그들은 과거의 나만 알기 때문이다. 나는 학창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가깝고, 그 시절의 나는 보상심리와 야망, 주위 사람들의 기대가 빚어낸 거짓된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거짓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여전히 인정과 갈채를 갈구하는 내 안의 열일곱, 열여덟 소녀를 본다. 그 소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매우 불편해진 지 오래다. 이제는 그때의 나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싶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정 건영이라는 분이었다. 국어 담당이었고 등단한 소설가였다. ‘골패’라는 단편소설로 유명해져서 당시 TV문학관에서 그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하기도 했다. 하이틴스타였던 조용원이 성숙한 연기를 해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선화야, 무슨 과를 쓸 생각이니?”

“아직 모르겠어요. 영문과를 생각하고 있어요.”

“영문과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뭐야?”

“나중에 소설을 쓰는 데 문학을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소설가인 선생님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선화야, 법대에 가라. 넌 충분히 갈 수 있어. 법대에 가도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중학교 때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여자 미술 선생님이 한번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의대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의사가 되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나는 이과보다는 문과가 맞았고 피를 보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런 내가 무슨 수로 의대에 가서 인체를 해부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미술 선생님의 조언을 고맙게 생각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건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속으로 답했다. 

  학력고사를 목전에 둔 시점에 담임 선생님은 내게 법대에 가라고 했다. 공부를 잘하면 의대나 법대를 꼭 가야 하는 것일까. 못내 아쉬워하면서 나를 설득하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법을 공부하는 건 지겹고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흥미를 갖고 할 수 있는 공부를 원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내게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한 사람은 그 두 선생님이 전부였다. 지금이야 그분들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나도 인생을 꽤 살아보았고,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현실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오로지 서울대가 목표였지 구체적인 과를 정해놓지 않았다. 대학도 중요하지만 어떤 과를 선택해서 진로를 잡아야 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때 담임 선생님의 조언대로 법대에 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마침내 학력고사가 다가왔다. 전날 미리 학력고사를 치르는 학교에 갔다가 나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공부했던 교과서를 책상 위에 쌓아놓았더니 무려 열여섯 권이었다. 삼 년 동안의 땀이 고스란히 서린 책들. 내 손때가 묻은 페이지들. 이제 내일이면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될 터였다. 그날 나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런데 저녁 시간이 되자 은근히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내일이 그 중요한 학력고사 날인데 나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3 일 년 동안 두 살 어린 남동생이 내 도시락을 싸줬다. 그것이 익숙해졌을까. 그날 동생은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컴컴한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드러누워 속상한 감정을 달랬다. 저녁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그날만큼은 내 손으로 밥을 차려 먹고 싶지 않았다. 서럽고 슬픈 마음이 복받쳤다. 고작 고1에 불과한 남동생이 나에게 마음을 써 주길 바라는 게 서글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누군가 거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연 사람은 사촌 언니였다.

“뭐 하니, 내일 시험인데? 불도 꺼놓고.”

“언니...”

  언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학력고사 본다고 언니가 나를 챙겨주러 왔다는 게 너무나 고마웠다. 언니는 소고기를 사 왔다. 곧 부엌에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기분이 금세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벌떡 일어나 책가방을 챙기고 언니가 차려준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달려와 주었던 언니들, 형부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 고마움을 깨달았다. 나 혼자 힘으로만 살아온 줄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다음 날 일찍 고사장에 도착했다. 후배들이 학교 입구에서 “선배님들, 파이팅!”하며 응원을 보냈다. 나는 준비해 간 우황청심환을 먹고 교실로 들어갔다. 내 자리는 중간 창가 쪽이었다. 바로 옆에 라디에이터가 있었다. 12월 학력고사 날은 이상하게도 매년 맹추위가 덮쳤다. 그해도 꽤 추웠다. 교실 라디에이터가 교실을 훈훈하게 덥히고 있었다. 항상 시험 전에는 긴장했지만, 시험이 시작되면 늘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게 시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장 걱정했던 수학 시험은 예상외로 쉬웠다. 좋은 징조였다. 수학 점수에 따라 전체 점수가 오락가락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3교시 시험이 시작되자 라디에이터 열기에 살짝 졸음이 왔다. 그래도 이제 절반이 끝났고 수학을 잘 치렀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나머지 시험을 모두 치렀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했다. 끝이다. 느낌이 좋았다. 300점은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서울대에 가는 거다. 모든 게 끝났다는 믿기 어려운 후련함과 가벼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학부모들이 보였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서 점수를 맞춰보고 잠이나 실컷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정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반쯤은 웃는 얼굴로, 반쯤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시험은 어땠니?”

내 대답은 엉뚱했다. 

“선생님, 수석은 어려울 것 같아요...”

선생님이 내가 전국 문과 여자 수석을 차지하길 기대하실 거라는 생각이 순간 스쳤기 때문이었다. 기대하지 마시라고 확실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내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내 목표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훨씬 강했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수고했다.”

“네, 선생님.”

  선생님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가는데 “선화야,”하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외삼촌이 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오고 계셨다. 어제는 언니, 오늘은 외삼촌.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 친척들이 있다는 게 든든했다. “저녁 먹으러 가자.” 삼촌은 근처 고깃집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집에 가서 일찍 잠이나 자려던 나는 신이 났다. 차가운 겨울 저녁 공기가 살을 에어왔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나는 고깃집이 처음이었다. 삼촌은 맘껏 먹으라며 숯불갈비를 시켜주셨다. 그리 맛있는 고기가 있는 줄 몰랐다. 여섯 시가 되었다. 식당에서 켜 놓은 TV로 학력고사 문제 풀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냈다. 정확하게 답을 표시한 시험지였다. 밥을 먹다 말고 한 과목, 한 과목 정답을 확인했다. 틀린 문제는 거의 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제일 떨렸던 수학은 두 개밖에 틀리지 않았다. 모두 채점을 마치고 나니 314점이 나왔다. 

“314점이예요, 삼촌.”

“잘한 거냐?”

“네, 저 서울대 갈 수 있어요.”

“잘했다.”

삼촌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내가 공부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평소에 나에게 뭐가 되라거나 어떤 기대를 표현한 적이 없는 삼촌이었다. 그래서 삼촌을 대할 때는 별로 부담이 없었다. 외삼촌은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우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외삼촌이 돌아가시는 날 병문안을 갔다. 외삼촌은 통증을 못 이겨 모르핀을 맞고 잠들어 계셨다. 나는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무 기척도 없이 홀연히 외삼촌이 떠났다.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외삼촌이 베풀었던 은혜를 자식도 아닌 조카인 내가 임종을 곁에서 지킨 것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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