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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17. 2024

입양소설. 너에게 가 닿기까지

1부. 7장

  4월 둘째 주 토요일. 선유와 호진은 무궁화호 기차에 앉아 있다. 호진은 운전 면허증이 있었지만, 아이도 없는데 굳이 차를 장만할 이유가 없다는 데 두 사람은 오래전에 동의했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지구 환경도 염려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아이를 입양하게 되면 호진은 운전을 시작해야만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기차를 타고 아이를 만나러 다녀야 할 것이다.

  선유는 오른발을 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오월을 가장 좋아했던 선유는 T.S. 엘리어트가 잔인한 달이라고 불렀던 사월이 이렇게 찬란할 수도 있는지 의아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유독 따뜻한 봄 날씨에 온천지가 웃음을 터뜨리고 공기는 가볍게 춤을 추고 있다. 자연은 선유의 설레는 마음에 감응하여 떨고 있는 것만 같다. 호진은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다. 그의 마음에는 희야라는 아이에 대한 호기심 외에 아직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차역은 한산했다. 도시 외곽에 역을 지어놓았으니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이다. 역에서 보육원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택시가 다니지 않아 두 사람은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는 곧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작은 다리를 지나 양쪽으로 논이 나타나는 곳에 멈춰 선 버스에서 내리자 살짝 흙먼지가 일었다. 선유는 어렴풋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 마을을 떠올렸다. 마을이 없는 한적한 곳이라 고향 마을과는 달랐지만, 논이 펼쳐져 있는 풍경이 순식간에 사십 년도 넘은 옛 추억을 잠시 소환했다. 이런 시골에 희야란 아이가 살고 있다니.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태어난 호진에게 늘 시골 사람이라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곤 했던 선유는 비슷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희야라는 아이가 벌써 친근하게 느껴졌다.

  “저기가 보육원인가 봐.” 선유는 도로의 맞은편 논 한 가운데 지어진 몇 채의 건물을 가리켰다. “보육원이 논 한 가운데 있네, 신기하다.” 도로를 건너자 살짝 좁은 내리막길이 보육원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다. 내리막길 옆으로는 비스듬한 언덕에 풀과 야생화가 어우러져 바람에 흔들거렸다. 아무도 가꾼 흔적이 없는데 분홍색, 노란색, 파란색 꽃들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듯했다. 선유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쉬 진정시키지 못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보육원의 육중한 철문을 지나자 이층으로 된 본관 건물이 나타났다. 그 건물 오른쪽으로 하늘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일 층 짜리 건물이 보였다. 본관 건물을 빙 둘러 입구 쪽으로 가니 운동장이라 할 만큼 꽤 넓은 마당이 나타났고 또 다른 건물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보육원 규모가 꽤 크구나.’ 선유는 생각했다. 마당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흩어져 뭔가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놀이하다 말고 선유와 호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고, 어떤 남자아이는 “안녕하세요?”하고 소리쳤다. 다른 아이들은 누가 왔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 아이 중에 희야가 있을까?’ 궁금증을 억누르며 선유는 본관 정문으로 들어서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국장과 먼저 면담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장은 오십 대 후반 정도, 안경 너머 눈매가 조금 날카롭게 보이는 여성이었다. 빠르게 사무실 안을 훑어보던 선유의 눈은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에 머물렀다. 6.25 전쟁 이후 보육원을 설립한 미국 선교사의 흑백 사진이었다. 보육원의 역사가 그 사진 한 장에 박제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아이가 이 보육원을 거쳐 입양되었을까. 홀트에 입양을 의뢰하기 전에는 이 기관에서 직접 아이들을 입양 보냈다는 것을 선유는 임 소장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이를 입양하시려는 동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꽃무늬 천으로 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국장은 부드러운 말투로 질문했다. 홀트에서 넘어갔던 입양 동기를 여기서는 묻는구나. 선유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준비해뒀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풀어냈다. 아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애환에 대해.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여자한테는 아이가 중요하죠. 아버님은 어떠세요?”

“저는 뭐, 아이 없이 지내도 괜찮은데, 아내가 간절히 원하니까요.”

“어유, 아내가 원하신다고 따라주시는 거네요. 좋은 남편이시네요.”

호진은 부정하지 않고 허허 웃었다. 선유는 호진에게 강한 입양 동기가 없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국장의 표정을 살폈다. 국장이 더 이상 호진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크게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희야는 저희가 입양 보내려고 애썼던 아이예요. 그런데 잘되지 않았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아기 때도 보러 오신 분들이 있었는데 막상 입양하지는 않으셨어요. 작년에도 입양 갈 뻔했는데 결국 안됐어요. 그래서 좀 상실감이 있는 것 같아요. 희야가 아주 순하고 똑똑하고 여기서 생활도 모범적이어서 가정으로 가면 잘 자랄 텐데요. 여기 아이들이 다 희야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희야 말고는 입양 보낼 아이가 더 없는 건가요?”

“네. 지금 희야와 동갑인 여자아이 한 명이 입양 절차 진행 중이고 그 외에는 없어요. 저희가 입양 보낼 아이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합니다.”

선유는 국장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희야가 입양 대상 아동으로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말로 들렸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왜 입양 대상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나 첫 만남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선유는 그 궁금증을 가슴에 묻어두었다. 희야가 가정에 가면 잘 자랄 아이라는 말이 희망의 씨앗처럼 마음의 모판에 떨어졌다.

  “희야같이 이미 큰아이는 입양이 금방 이뤄지지는 않아요. 몇 개월 아이와 친해지고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죠. 아이도 마음을 열고 입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군요. 이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선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었지만, 오히려 그 말을 듣자 더 안도감이 생겼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이에게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권리를 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후원자라고 소개할게요. 입양 이야기는 차차 하시는 게 좋겠어요. 처음에는 와서 만나시고 시간이 좀 지나면 하루 정도 집에 데려가서 지내보세요. 방학 때는 며칠 데리고 계셔도 좋아요. 그렇게 조금씩 서로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 네.”

처음 듣는 상세한 설명이 선유에게는 생소하면서도 신선했다. 이런 식으로 입양을 진행하는 거구나. 소영이는 부모가 만나자마자 며칠 후에 바로 데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입양 허가를 받았다. 선유는 그것이 입양 전제 위탁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소영이는 더 어려서 그리 빨리 보낸 것일까. 소영이도 지금처럼 천천히 진행했더라면 그 집에서 더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았을까. 선유는 소영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역시 결례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소영 때문에 희야는 더 신중하게 진행하는지도 몰랐다. ‘이런 조심스러운 접근이 맘에 들어.’

  “희야 만나보셔야죠.”

“네. 그런데 희야가 몇 살인가요?”

“지금 일곱 살입니다.”

“일곱 살이요? 홀트 소장님은 다섯 살이라고 하셨는데요?”

“착각하셨나 보네요.”

국장은 살짝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유는 일곱 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다섯 살이라고 해도 한번 시도해보자고 생각했는데, 일곱 살이라니. 이 아이가 정말 맞는 것일까. 우연이라기엔 기막힌 일치가 아닌가.

“지금 희야 어디 있나요?”

“아마 마당에 있을 거예요. 나가시죠.”

마당? 그렇다면 방금 그 아이들 가운데 희야가 있었다는 말인가. 선유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느낌일 거야. 호진을 처음 만났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아주 낯선 감정.

  국장과 함께 마당을 향해 걸어가면서 선유는 마당 전체를 쭉 둘러보았다. 마당에는 미끄럼틀, 시이소오, 그네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당 한 가운데 크게 자란 버드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놓았다. 아이들이 마당에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 있었다. 어디에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는 거지? 그런데 몇 걸음 떼지 않아 바로 정면에 두 명의 여자아이가 손을 붙잡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유는 직감적으로 그 두 아이 중 한 명이 희야라고 생각했다. 오른쪽에 있는 여자아이가 언니인지 더 키가 컸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에 입술이 두툼한 아이가 선유와 호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키 작은 아이는 조금 긴 머리를 뒤로 묶었고 고르지 않게 잘린 앞머리가 눈썹 위로 드리워있었다. 두 아이 모두 촌스러운 시골 느낌을 풍겼다. 선유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큰아이보다 뭔가 겁먹은 듯 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선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저 아이였으면 좋겠다.’ 국장은 바로 그 아이를 향해 “희야야, 후원자님 오셨네.”라고 말했다. 다행이다, 저 아이구나! 선유는 안도하며 그 아이 쪽으로 다가갔다.

  “네가 희야구나!” 선유는 활짝 웃으며 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야는 얼굴이 동그랗고 살결이 약간 까무잡잡했다. 선유가 좋아하는 강아지같이 큰 눈을 가지진 않았지만, 순박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희야, 예쁘네.” 선유는 기대했던 것처럼 ‘이 아이야!’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 약간 실망스러웠다. ‘첫눈에 확 마음에 들어온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 정도는 아니네. 그래도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앞으로 시간은 많았다. 호진을 만났을 때도 그와 결혼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었다. 이 정도 호감이면 충분했다. 알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확신이 올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연이 아니겠지. 선유는 이렇게 만났다고 해서 꼭 희야를 입양해야 한다는 의무로 자신을 옭아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무감이 과연 누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까. 임 소장은 입양을 진행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라는 말에 선유는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일단 시작할 수는 있겠어.’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이 가지 않으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이 지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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