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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25. 2024

입양소설. 너에게 가 닿기까지

14장

  7월 중순이 지나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온 어느 날 국장의 전화가 걸려 온다.

“여름에 희야와 어떻게 지낼지 계획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지금처럼 두 주에 한 번씩 만나는 것 말고 달리 세운 계획이 없는데요.”

“이렇게 해 보세요. 한 열흘 집에서 데리고 지내보세요.”

“열흘씩이나요? 이박 삼일밖에 같이 지내본 적이 없는데 희야가 열흘이나 저희와 있으려고 할까요?”

“이번 여름에 희야 마음을 확 잡으셔야지요. 여행도 가시고 친구도 만나게 해주시고 해서 점점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게 하셔야 해요.”

“네...한번 해 보겠습니다.” 

새로운 과제다. 임 소장과 국장은 선유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과제를 부여해서 선유를 계속 앞으로 떠민다. 그들의 지도를 방향타 삼아 선유는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중이다. 이번에도 국장을 믿고 시도해 볼 참이다. 

  열흘이라니. 선유는 걱정이 앞서고 두렵다. 그렇지만 한번 해 보고 싶다. 열흘을 희야와 지낼 생각을 하니 평형추 한쪽에는 부담감이, 한쪽에는 설렘이 얹어진다. 어느 쪽 추가 더 무거운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희야와 아주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열흘씩이나 무엇을 해야 한담? 아, 일단 여행을 가는 게 좋겠구나! 목적지는 전부터 가고 싶던 거제도! 남은 시간은 어떻게든 채워볼 양이다. 니나와 친해질 수 있도록 기회를 더 만들 참이다. 그런데 거제도에 세 사람만 간다면 희야가 어색해서 경직될 수도 있다. 데려갈 아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에는 부랴트 출신 비카가 떠오른다. 최근 이혼한 후 다섯 살 아들 성준을 혼자 키우는 엄마다. 형편도 어렵고 성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니 비용은 선유네가 부담하기로 한다. 비카와 성준이도 거제도는 가본 적이 없다. “좋아요, 소냐 이모!” 나이 차이가 열 살밖에 나지 않는데도 종종 선유를 ‘이모’라고 부르는 비카는 흔쾌히 승낙한다. 마치 큰 행사라도 치르듯 선유는 종이를 앞에 꺼내 놓고 날짜를 적으며 식단을 적고 일정을 계획한다. 

  첫날은 금요일. 선유는 아침부터 식사 준비로 바쁘다. 이제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희야를 소개해주고 싶어서 몇 가정을 저녁에 초대했다. 선유는 요리하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다. 매일 먹을 반찬을 만드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다. 아마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 살림을 해야 해서 살림에 거부감이 있는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자기를 분석한다. 그런 선유도 러시아 유학 시절에는 결혼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유학생들을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하곤 했다. 러시아에서는 사 먹을 수 없는 김밥, 닭튀김, 잡채, 심지어 탕수육까지 배워서 한 상 든든히 차려내곤 했다. “내가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요리 솜씨가 없는 편은 아니야.”라고 선유는 종종 자기를 치켜세우곤 했다. “내가 만든 거지만 참 맛있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귀국해서도 선유는 가끔씩 손님들을 초대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러시아에서 닦은 솜씨를 그때마다 발휘하곤 했다. 

  손님들이 먼저 도착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간단히 희야에 대한 정보를 주고 편하게 대해 달라고 부탁도 곁들인다. 이어 붙인 두 개의 상 위에는 이미 샐러드, 잡채, 불고기, 해파리냉채 등 음식이 차려져 있다. 희야가 거실에 들어서자 손님들이 “아유, 희야 왔네. 어서 와.”하며 환한 웃음으로 맞이한다. “희야야, 엄마가 희야 소개해주려고 손님들 초대했어.” 선유가 미리 희야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선유에게는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발상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희야는 별로 어색해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선유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갑자기 혼자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한다. 아무도 희야에게 질문하지 않았는데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내뱉는다. 손님들은 그런 희야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선유는 잠시 당황스럽다. 작년에 한 심리검사 결과지에 주변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고 쓰여있던 항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래도 위축되지 않고 생기있어 보여서 다행이야. 어쩌면 너무 어색해서 일부러 긴장을 푸느라고 그러는 건지 몰라.’ 희야가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할 때마다 선유는 온갖 추리를 가동한다. 희야 성격의 다양한 측면들, 보육원에서 7년 동안 살면서 형성된 특성들에 대해 선유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막연히 살면서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고 낙관한다. 사람들이 ‘커서 입양된 아이는 너무 힘들다’고 하는데 도무지 구체적으로 뭐가 힘들다는 건지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선유는 미지의 안개 속을 들어서는 두려움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행복의 신기루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다음 날, 니나와 만나 영화를 본 후 니나 집 근처에서 함께 식사한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둘 다 어색함이 가셨다. 니나가 사는 아파트 안 분수대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나온다. 단지 내 아이들은 하얗게 물보라를 흩뿌리며 쏟아지는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처럼 자유롭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꽁지 머리를 묶은 희야는 온몸으로 물을 맞으며 쭈뼛거리고 서 있다. 굳은 표정의 베일 뒤에서는 ‘나도 물놀이하고 싶은데.’라고 아쉬움이 말을 내뱉고 있다. 낯선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주눅 들고 움츠러드는 희야. 언젠가 희야도 당당하고 천진난만하게 저 아이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 선유는 물끄러미 자기를 쳐다보는 희야에게 응원의 손짓을 보낸다. 

  셋째 날은 일요일이다. 두 번째로 희야를 교회에 데리고 간다. 역시 긴장된 빛이 역력하다. 희야는 자기에게 다가와 “아유, 예쁘게 생겼네.” “매력 만점이야.” “반가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부담스럽다. 이렇게 관심의 초점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어디로 몸을 숨겨야 할지를 모르겠다. 교회 식당에서 식사하는 동안 캠프 때처럼 밥을 먹다가 수저를 공중에 든 채 빤히 주위 사람들을 둘러본다. 이 교회에는 아이들이 많다. 남자 어른과 여자 어른, 아이가 함께 밥을 먹는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희야에게 아직도 미지의 언어다. 일 년 후, 희야가 온교회를 자기 집처럼 쓸고 다닐 거라는 말을 선유에게 누가 미리 해준다면, 선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돌아오면서 홈플러스에 들러 약속한 네 발 자전거를 산다. 자전거를 사서 집에 두고 올 때마다 탈 수 있다고 하면 희야가 집에 오는 게 더 즐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희야는 자기 물건이 생겼다는 데 흥분한다. 빨간색으로 칠해진 앙증맞은 자전거가 희야에게 딱 어울린다. 희야는 곧바로 자전거에 올라타 어둑어둑해진 공원 옆 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소파에 앉자마자 희야가 갑자기 침울해진다. 선유의 폰만 만지작거리며 말이 뚝 끊어진다. “희야야, 왜? 기분이 안 좋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선유가 조심스레 묻는다. “졸려요. 빨리 잘래요.” 대답하는 희야의 눈가가 벌겋게 변한다. 

“희야, 울어?”

“아니요. 졸려요.”

“아닌 것 같은데...희야, 무슨 생각해? 친구들 보고 싶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진다. 이번에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운다.

“보육원에 보내주세요. 가고 싶어요. 엉엉.”

“그래, 그래. 엄마가 이해해. 지금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갔다가 수요일에 다시 집에 오자. 응?”

선유는 희야의 몸을 두 팔로 껴안는다. 조그만 가슴이 들썩거린다. 호진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맺힌다. ‘희야가 가엾다.’ 호진에게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아침에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한다. “희야, 바꿔주세요. 제가 얘기해 볼게요.” 구원투수로 나서주는 국장이 이리 고마울 수가 없다. 

“여보세요?”

“희야야. 지금 보육원에 옴이 퍼졌어. 언니, 오빠들이 아파서 병원에 갔어. 네가 오면 옴이 옮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오지 않는 게 좋아. 알았지?”

“네.”

“아빠, 엄마랑 재미있게 놀다 와. 알겠지?”

“네.”

희야는 옴이 뭔지 안다. 작년에도 옴이 퍼져서 오리 방 언니들이 병원에 갔었다. 얼굴과 등, 팔다리가 부어오르고 물집이 잡히고 가려워서 언니들이 잠을 설치고 우는 것을 봤다. 빨갛게 부어오른 모양이 흉측스러워 희야는 겁이 났다. 보육원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진다. 선유는 아이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럽지만, 희야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라 안도한다. 매번 국장이 나서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카가 성준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오후에 함께 놀자고 불렀는데, 선유는 아예 일주일을 함께 보내자고 제안한다. 그래야 희야가 또 우는 상황을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비카는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집과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다. 선유는 비카를 내어쫓다시피 한 성준 아빠를 본 적이 없다. 부랴트족은 한민족과 같은 몽골 계통이라서 외모로 쉽게 분간이 가지 않는다. 비카가 말을 하지 않으면 한국인으로 보일 정도다. 그런 비카를 닮지 않은 성준은 아빠를 닮았을 것이다. 제법 잘 생기고 귀여운 녀석이다. 볼과 몸통이 다 동글동글한 아이다. 성격이 예민한지 교회에서도 떼를 많이 부리고 울어서 비카가 어쩔 줄 몰라 할 때가 자주 있었다. 아마 한국말이 서툰 엄마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서 더 떼를 심하게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후에 선유는 비카와 희야, 성준과 함께 니나를 만나 아이들이 ‘방방이’라고 부르는 트램폴린을 뛰며 노는 곳으로 간다. 선유는 처음 가보는 곳이다. 오십 평 정도 되는 공간에 온통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트램폴린이 깔려 있고 한쪽 벽에는 신나는 동요 가사와 영상이 나오는 모니터가 걸려있다. 아이들이 몇 명 없어 공간은 온통 세 아이의 차지가 된다. 니나와 성준은 희야의 에너지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희야가 도약하는 높이는 눈을 의심할 정도다. 옆에 있던 니나와 성준은 희야가 뛰면 진동으로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넘어진다. “조심해, 희야야.” 아이들이 다칠세라 선유도 슬쩍 가세한다. 처음 뛰어보는 트램폴린이 만만치 않다. 십 분이 못 되어 선유는 지쳐 자리에 드러눕는다. 한 시간이 넘게 잠시도 쉬지 않고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희야는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마샤를 닮았다. 닭싸움 이후 다시 한번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진 아이라는 걸 확인한다.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일까.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약간 불편한 선유는 희야처럼 뛰어본 적이 없다. 함께 노는 니나만 봐도 희야의 범상치 않은 힘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희야의 단발머리와 물방울 모양 무늬가 박힌 검은색 원피스 아래로 튼튼한 종아리가 허공에 솟구칠 때마다 선유는 생명의 약동에 감탄한다. 저런 아이가 우리 딸이 될 수 있다니. 

  다음날과 또 다음날도 놀이의 연속이다. 스케이트장에 가서 호진이 함께 스케이트를 탄다. 처음 스케이트를 신어 본 희야는 처음에는 벽을 잡고 천천히 엉금엉금 걷더니 몇 바퀴를 돈 후에는 손을 떼고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운동신경 하나는 타고난 아이다. 스케이트 장 가운데에는 피겨 스케이트를 배우는 가냘픈 몸매의 여자아이들이 코치의 강습을 받고 있었다. ‘희야도 피겨 스케이트를 배우게 하면 어떨까.’ 김연아 선수가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이후 소치 올림픽까지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고 경기를 즐기는 일은 선유의 삶에서 큰 활력소였다. 청소년 때는 카타리나 비트의 팬이었고 이후로도 러시아의 여자 피겨 선수들을 좋아했다. 한국이 피겨 강국이 되리라고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김연아 선수는 민족적 정체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선유에게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여기게 했다. 벌써 희야의 미래를 꿈꿔보는 자신을 자각하며 선유는 피식 웃음을 흘린다. 피겨 가르치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김연아 엄마처럼 쫓아다닐 수는 있고? 희야가 좋아할지도 모르고. 지레 혼자 꿈을 꾸는 자신이 우습다. 

  마침내 거제도로 떠나는 날이다. KTX로 부산까지, 부산에서 버스로 거제도까지, 다시 택시를 타고 리조트까지 장장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다. 선유는 칭얼거리는 성준을 달래느라 애를 먹는 비카에게 미안해진다. 진한 분홍색 티에 짧은 빨간색 치마를 입은 희야는 처음 탄 KTX가 신기하기만 하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어찌나 빠른지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들뜬 기분이 쉬 가라앉지 않아 연신 기차 안을 두리번거린다. 에너지가 넘쳐나던 희야도 리조트에 도착할 때쯤에는 기운이 빠진다. 이렇게 오래 이동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뙤약볕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흐른다. 희야는 슬슬 짜증이 나지만 티를 낼 수가 없다.

  리조트에서 가까운 구조라 해수욕장으로 직행한다. 지친 희야와 성준을 빨리 바닷물에 맡겨야 한다. 희야는 빨간 수영복을 입고 튜브를 허리에 낀 채 바닷물에 둥둥 떠다닌다. 비카가 성준이와 함께 해변에 가까운 얕은 물에서 놀아준다. 호진이 바닷물에 들어가 희야 옆을 지키느라 오락가락한다. 선유는 모래사장에 앉아 이게 꿈일까, 현실일까를 가늠해본다. 얼마 전까지 어디를 가나 선유와 호진 두 사람뿐이었다. 갑자기 일곱 살 여자아이가 나타나 두 사람과 함께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파란 바닷물과 대조되는 빨간 수영복을 입은 희야의 뒷모습이 사랑스럽다. 우리가 진짜 한 가족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 있겠지? 선유는 이제 꿈을 믿기 시작한다. 희야와 헤어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딸이 된다니. 내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되는 것일까. 선유는 깊은 심호흡을 하고 가늘게 눈을 떠 하염없이 출렁이는 바다에 말을 건다. 

  다음 날은 리조트 안에 있는 오션베이에서 하루 종일 물놀이로 시간을 보낸다. 전날에는 얌전했던 희야가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전에 없이 까불거린다. 파도 풀에서 한참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호진을 보고 “아빠, 이리 와.”, “저리 가.” 심지어 “싫어.” 소리까지 한다. 호진은 당황스럽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자기보고 지시하는 모양새가 함부로 구는 것 같아 약간 불쾌하기도 하다. 희야를 키울 때 그런 모습을 자주 나타낸다면 어떨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선유는 희야의 그런 새로운 모습이 또 낯설지만, 오히려 좋은 현상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만큼 희야가 긴장을 풀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방전되지 않는 배터리처럼 오션베이를 휘젓고 다니는 희야가 이제야 그 또래 어린아이답다. 

  그날은 마침 선유의 생일이다. 리조트 안에서 딱히 생일을 축하할 방법이 없다. 선유는 “엄마 생일이니까 카드 써 줄래?”하고 넌지시 물어본다. 희야는 리조트에서 카드를 파는지 알아보겠다며 호진과 지하 매점을 샅샅이 훑는다. 

“카드 파는 데가 없어.”

“그럼 돌아가서 카드 써줄 거야?”

“응.”

이틀 후 집에 돌아와 희야는 호진과 잠시 밖으로 나간다. 케이크를 사 와 촛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준다. “사랑하는 우리...”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호호 불어 끈 초에서 가느다란 흰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갈 때 희야가 불쑥 작은 흰 봉투를 내민다. “카드구나!” 선유는 기대에 차 봉투를 연다. 카드에는 왼쪽 위에 까만 머리통이 큰 남자가, 오른쪽에 긴 빨간 머리를 묶은 여자가 그려져 있다. 남자 위에는 ‘아빠’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생일 축하해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그동안 우리 엄마 설거지했지요. 만희 힘들종?” 검은 볼펜, 빨간 볼펜, 파란 볼펜으로 번갈아 쓴 글이다. 마지막에 틀린 글자마저 감동의 파고를 일으킨다. 설거지하는 게 힘들어 보였던 모양이다. “고마워, 희야야. 엄마 너무 기분 좋아!” 선유는 희야의 볼에 뽀뽀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희야에게는 뭐든지 조심스러워야 한다. 

  열흘의 꿈같은 시간이 무사히 지났다. 보육원에 희야를 데려다주고 오면서 선유와 호진은 처음 희야를 만났던 날을 떠올린다. 

“이제 우리 한 가족이 된 것 같지 않아?”

“그러네.”

“난 이제 희야를 포기할 수 없어. 희야가 조금씩 변해가니까 자신감도 생겨. 이제 희야가 흔들리더라도 난 흔들리지 않을 거야. 당신은 어때?” 

“난 아직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아. 기도를 더 해야겠어.”

“그래. 당신 마음도 분명해져야지. 그래도 이번 여행 정말 좋았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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