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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Mar 13. 2023

방망이 깎던 노인

화가 날 때, 내가 하는 일

  은행에 방문하는 사람 대부분은 도장을 가지고 온다. 요즘엔 서명 거래나 다른 매체로 본인인증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통장 거래의 가장 기본은 도장이다. 그리고 이 도장은 대부분은 빨간 인주를 찍어서 사용한다. 요즘에는 잉크가 자동으로 나오는 자동도장도 쓰는 일도 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빨간 인주를 푹 찍어서 쓰는 도장을 찍는다.      


  그런데 이 인주는 단점이 참 많다.

  가장 큰 단점은 깔끔하게 잘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 사용한 지가 오래되어 인주가 말랐다거나, 바닥이 평평하지 않거나, 혹은 너무 딱딱할 경우, 도장은 제 모양을 잘 안 보여준다. 특히나 도장이 클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나는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마우스 패드를 가져와 그 위에 전표를 올리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도장을 누른다. 이렇게 찍어도 잘 안 찍힐 때가 있다. 아오! 

   둘째는 흔적을 많이 남긴다는 점이다. 손이나 옷에 묻는 건 애교다. 인주는 도장에도 흔적을 남긴다. 인주는 도장의 틈에 스며들어 글자를 흐리게 한다.


  가끔 오래된 도장을 사용하는 고객님의 경우, 도장이 거의 안 찍히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두 가지 이윤데, 하나는 도장 자체가 정말 오래되어서 달아서 그런 경우고, 또 하나는 인주 찌꺼기가 그 틈에 낀 경우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     

  이때는 인주에 붙어 있는 청소 솔로 살살(이라고 쓰고 팍팍 이라고 읽는다. 이런 경우 인주가 튀어 손등이 엉망이 되는 건 덤이다) 닦아 도장을 찍는다. 그러면 훨씬 잘 찍힌다. 하지만 정말 오랫동안 방치한 도장이라면 이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도장을 만난 날. 그날이 한가한 날이고, 손님이 아주 고령인 경우라면, 나는 커트 칼을 집어 든다.     


“도장에 인주가 끼여 잘 안 찍히는데, 제가 좀 빼 드릴게요.”   


  나는 정말 섬세히 움직인다. 신중해야 한다. 잘못하다가 다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도장의 글자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지우개 때 같은 인주 찌꺼기가 후드득 떨어진다. 묘한 쾌감이 든다. 


  어린 시절, 나는 한때 고고학자를 꿈꿨다. 땅속에 숨어 있는 오래된 귀한 것을 내 손으로 발굴해 낸다는 것이 멋져 보였다. 이 순간, 나는 꿈을 이뤘다. 나는 지금 고고학자가 되어 땅속이 아닌 인주에 묻힌 하은주 시대의 귀한 한자 유물을 캐내고 있다.


  그렇게 집중해서 인주 찌꺼기를 빼고 있으면 꿈을 이룰 건 같은 만족감은 물론, 내가 방망이 깎던 노인이 된 기분이다. 물론 내게 그 노인처럼 장인정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애정, 그리고 고집이 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앞의 손님이 커다란 엿을 주고 갔을 때면, 나도 사람인지라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음 손님에게 그 영향이 간다. 자연스럽게 다음 고객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내 귀에도 들어온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손님은 무슨 죄인가?

  그는 오직 번호표를 잘못 뽑았다는 이유로 불친절한 직원을 만난 것이다! 정신을 차린 나는 손님에게 도장을 닦아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칼을 빼 들고 묵묵히 도장을 판다.


  구석구석 박힌 인주 찌꺼기를 빼내면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방망이 한 자루에 마음을 기울이는 노인처럼, 나도 고객에게 마음을 기울여야지. 나도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나는데, 고객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장을 파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깨끗하게 닦아낸 도장을 돌려줄 때는 평소처럼 제대로 웃음도 난다. 손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건 덤이다.


  물론 언제나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나 바쁠 때는 절대로 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거기, 내가 다음 번호표를 당기지는 않고 도장이나 파고 있다고 욕하는 당신, 일단 화를 좀 가라앉혀보는 건 어떨까?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난다.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많이 울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인주를 파낸다. 직원들 모두 자기만의 돌파구를 찾는다. 내가 방망이를 깎는 노인이 되었다면, 누군가는 가족의 사진을 붙여 바라보고, 누군가는 움직이는 고양이 캐릭터를 바탕화면에 띄워두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마음을 되살린다.

 

  그러니까, 거기 당신. 오늘 만난 직원의 상태가 좀 안 좋다면, 화를 내기 전 한 번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건, 방망이를 깎는 노인이 되지 못한, 이제 막 나뭇조각을 집어 든 초짜일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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