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쏭쏭 Mar 13. 2023

포리약, 주세요

진라면 순한맛과 맥스웰하우스 커피믹스

  사람들의 성향은 다양하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의 성격이 다양한 것도 당연한 말이다. 억척스러운 할머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할머니들도 있다. 목소리가 작고, 실수할까 봐 극도로 조심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높임말을 쓰시는 분들…. 나는 그런 분들을 보면 항상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 된다.


  이 할머니는 그런 할머니의 대표적인 분이셨다. 꼬부랑 할머니신데, 마트에 들어오면 새파랗게 젊은 내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신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할머니가 사시는 건, 오직 두 가지다.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께서 먼저 인사를 하셨고, 다른 일을 한다고 정신이 없던 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나는 할머니께서 언제나처럼 찾으시는 물건을 사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포리약 좀 주세요.“     


......네? 뭐라고요? 뭘 달라고요?     


"포리약이요." 


...포리약.

...... 포리약…….

.... 도대체 포리약이란 무엇인가?     


  태생이 시골 출신이었다. 다시 시골에 내려와 어른들만 주야장천 만나고 있었다. 웬만한 사투리는 다 꿰고 있었고, 심지어 어른들보다 더 많은 사투리를 구사하는데도, 포리약은 처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귀엽고 상냥한 할머니를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게다가 내가 포기한다면 할머니는 다른 마트를 가야 하는데, 할머니에게 그렇게 힘든 일을 시킬 순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이 포리약에 대한 답을 주진 않았다. 


  결국, 할머니께서 마트에 날아다니는 파리를 겨냥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렇다. 할머니가 찾던 것은 에프킬라-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뿌리는 파리약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 이제야 들렸다. 고작 포리를 못 알아듣다니! 사투리 대장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포리약을 사신 것에 만족하시며 돌아갔다. 나는 할머니가 떠나고 한참 동안 그 할머니를 생각했다.     


  마트에 오는 많은 할머니 중 내가 그 할머니를 기억하는 특별한 이유는, 할머니가 상냥하고 좋은 사람인 것도 있지만 그 할머니가 항상 같은 것을 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남들은 사지 않는-

     

  진라면 순한 맛과 맥스웰하우스 커피 믹스.


  할머니는 우리 마트에서 그것들을 사가는 유일한 사람이다.


**


  마트에 근무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어르신들은 기본적으로 미각이 약해져서 조미료를 강하게 사용한다. 그래야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감각은 연약해져서 자극적인 음식에는 몹시 취약하다. 그래서 혀를 자극하는 신맛것과 매운맛을 몹시 싫어하신다.    

  그래서 주 고객의 97퍼센트가 고령층인 우리 마트에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강한 맛의 라면(ex. 신라면)은 가져다 놓지도 않는다. 라면 중 제일 잘 팔리는 것은 안성탕면이었고, 미역국 라면이 신제품으로 나왔을 때(마트에 근무한 것이 벌써 n년 전이구나)도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꽤 잘나갔다.      


  어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입맛이 확고하는 점이다. 낯선 음식은 도전하지 않고, 기존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다. 특히 커피는 확실하다. 밥은 먹지 않아도 커피는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이 정말 많다. (커피를 좋아하는 건 젊은이들의 취향만은 아니다!) 노란 커피. 맥심 모카골드 커피 믹스, 이것만큼 충성도가 강한 품목도 드물었다. 한때 다른 브랜드의 커피 믹스가 맛있어서 발주했다가 안 팔려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어른들은 취향이 잘 변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마트에서 잘 팔리지 않는 제품을 가져다 놓는 것은 타격이 크다. 만약 팔리지 않아 악성 재고가 되어버리면……? 규정에 '인정감모'를 받을 수 있다고 나와있지만, 이 인정감모는 매출액 대비 이루어지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우리 마트 같은 경우는 분기에 라면 한 상자도 인정받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정말 큰 일이다. 진짜 내가 사 들고 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정말 비일비재했다.)     


  그러므로 진라면 순한 맛은 그렇다 해도, 맥스웰하우스 커피 믹스는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커피만 사셨다. 이유를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내 감은 경제적인 이유를 외쳤다. 당시 기준으로 (오래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맥심 모카골드 100t의 가격이 14천 원인데 반해 맥스웰하우스 100t는 8천 원대였다. 거의 절반 수준. 내가 발주를 하지 않으면 할머니의 경제엔 타격이 클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진라면 순한 맛도, 당시 마트에서 제일 저렴한 라면이었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어느 날, 진라면 순한 맛을 사러 오신 할머니께 여쭸다.     


"할머니. 이 라면이 그렇게 맛있어요?"

"우리 아들이 라면만 먹어요. 라면 없으면 밥을 안 먹어."     


  아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눈에 금방 눈물이 차오른다. 가슴이 쿵, 발치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랬다. 할머니에겐 아들이 있는데, 참 똑똑했다고 했다. 그런데 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친 이후 거동이 불가능해서 집에서 누워만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이 유일하게 먹는 것이 라면이라고 했다. 라면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고……. 


  시골, 고령 할머니의 경제 사정은 뻔했다. 그러나 아들을 향한 사랑까지 저렴한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몇 번이고 아들이 얼마나 똑똑했는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무거울 텐데 유모차 있는 데까지만 옮겨주겠다며, 빼앗듯 커피와 라면을 들었 옮겨주었다. 


**     


  지역농협 마트는 수익 사업으로 운영되지만, 실재로는 조합원과 지역민들을 위한 봉사활동 개념으로 운영되는 부분도 많다. 그 실례가 나는 '이동판매'라고 생각한다. 이동판매는 바쁜 농번기에 조합원들의 편의를 위해서, 혹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서, 마트 물건의 일부를 트럭에 싣고 동네에 나가 직접 판매를 하는 일이다. (현재는 우리 농협에서도 없어진 사업이다.)


  이동판매의 경우, 크기가 한정된 트럭에 판매할 물건을 실어야 하므로, 물건 선별에 고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보통 어른들이 주로 찾는지만 부피가 크거나 무거워서 평소 들고 가기가 어려운 물건이 주가 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소주와 맥주(자식들이 올 때 먹여야 한다고), 두루마리 휴지(부피가 커서 유모차에 싣기가 어렵다), 가루 세제(무겁다!), 라면(자주 드신다), 커피 믹스(자주 드신다) 등이 있다.      


  그날도 이동판매를 나갔다. 사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오는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뜻은 오는 손님들은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다. 오늘날은 누군가에겐 밤에 물건을 시키면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해 있는 것이 익숙한 시대지만, 누군가에겐 간장 한 병을 사려고 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나가야 하는 시대다.     


  저 멀리서 할머니 한 분이 유모차를 끌고 오신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익숙하다. 불안함에 다리가 달달 떨렸다. 아,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 우리 포리약 할머니였다.


“커피 주세요.”

“할머니…. 찾으시는 커피는 없어요.”

“그럼, 라면 주세요.”

“.... 그 찾으시는 라면도 없는데….”     


  둘 다, 잘나가는 품목이 아니다보니 당연히 싣지 않았다. 할머니는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죄책감이 몰려드는 걸 느꼈다.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30분을 걸어야 우리 마트에 올 수 있다.


  내가 이곳의 모든 사람을 다 챙길 수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정말 아쉽다. 할머니가 어느 동네에 사는 줄 알았다면, 이동판매를 나가는 날 즈음 할머니에게 커피와 라면이 떨어질 거로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아니 이런 가정들 말고, 그냥 내가 할머니께 미리 전화라도 해서 “이동판매 갈 건데 뭐 챙겨갈까요?”라고 물을 수만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이런 행위는 과잉친절이 맞고. 내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이 고민을 낳는다. 도대체 나는 어디까지 해줄 수 있고,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 걸까? 그 고민은 나를 오랫동안 따라다녔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후, 할머니는 내가 마트 업무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 마트에 오셨다. 나는 후임자에게 맥스웰하우스 커피 믹스의 발주를 중단하지 말 것을 제안하고 나왔지만……. 발주는 담당자 고유의 역할이다. 그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후, 벌써 5년이 지났다. 무슨 인연인지 나는 다시 그 지점에 와 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할머니를 다시 보지 못했다. 이번에 마트가 아니라 은행에 있어 할머니를 못 보나 싶어 직원들에게 물어봤지만, 그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 없다.

  혹시나 몰라, 마트 담당자에게 맥스웰하우스 커피 믹스를 요즘에도 발주를 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담당자는 맥스웰하우스 커피 믹스의 존재조차 모른다. 나는 축 처진 어깨로 내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 귀엽고 상냥한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이 포리약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내자 직원들은 다들 돌아가셨거나, 요양원에 가셨을 거라고 한다. 아마 직원들 말이 맞을 것이다. 본래도 나이가 많으셨고, 지금은 그때보다 세월이 더 흘렀으니 그럴 것이다. 그럴 거라고 나도 인정하면서도……. 나는 자꾸 생각한다.


  할머니의 아들이 기적처럼 나아서, 이제는 라면을 사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 걸지도 모른다고. 아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이제는 남들처럼 맥심 모카골드 커피 믹스를 마시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꿈꾼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아들, 잡으러 왔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