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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Mar 30. 2023

손님에게 맞을 뻔, 했다.

봄이 되면, 찾아오는 손님.


  이른 아침이었다. 낮에는 조금 덥다, 생각이 들 정도지만 아침은 쌀쌀한 요즘. 창구는 조용하다. 본격적인 농번기를 맞이하여 손님들이 전부 들로 나갔기 때문이다. 조용한 창구에 손님이 없다. 지점장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는데, 내가 눈치가 보인다. 아, 불편하다! 혼자만의 눈치를 보던 내가 이렇게 된 김에 미뤄뒀던 서류 작업이나 하자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손님이 왔다.     


  키가 크고, 좀 말랐지만, 굉장히 건장한 체격의 할아버지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이거 만기 됐어. 해지해줘."          


  할아버지께 통장을 받아 확인하니, 읭, 만기일이 내년이다.         

 

  "어르신, 만기가 내년인데요? 중도해지를 할까요? 그런 손해 신데…."     

  "내가 돈을 맡긴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못 찾아?!"     

  "날짜는 맞는데, 만기는 내년 오늘이에요. 이거 5년으로 해두셨어요."     

     

  그러자 할아버지다 통장을 다시 보신다. 다행히 이해하신 눈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통장을 꺼내며 여기서 돈을 찾아달라고 했다. 입출금통장이었다. 나는 빠르게 통장을 확인하며 되물었다. 잔액이 지나치게 넉넉했다. 이렇게 두면 안 되는데, 나는 그런 오지랖 같은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얼마 찾아 드릴까요?"     

  "천만 원."     

  "네? 천만 원이요…?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현금으로 필요하신 건 아니시죠? 수표는 드릴 수 있는데 현금은 어려워요."          


  내 말이 길어지자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천천히,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어떤 일 때문에 찾으시는 거예요?"     

  "내 돈을 내가 찾아간다는데! 왜 못 찾게 해! 네가 뭔데!"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의 진상들과 비슷한 반응이지만(?) 느낌이 달랐다. 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할아버지 옆에 있는, 함께 온 손님이 눈에 들어왔다. 30대에서 4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할아버지가 돈을 찾아간다고 한 순간부터 옆에서 조용히, 할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된다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나는 조금 긴장해서 다시 말했다.          


  "어떤 일로 큰돈을 찾으시는 거예요? 요즘은 사기가 많아서 이유를 들어야 돈을 내어 드릴 수 있어요.""     

  "나 비료 사야 해! 350포! 퇴비도 사야 하고! 쓸 돈이 얼마나 많은데! 그까짓 돈!"     

  "아. 그러시구나…. 그럼 아버님. 그럼 계좌이체를 하세요. 저희 직원이 금액 알려주면 제가 바로 통장으로 넣을게요. 그게 영수증도 안 챙겨도 되고, 통장에 기록도 남아 있으니 확실하지 않을까요?"     

  "뭐라고 자꾸 하는 거야?"          


  잘 들리지 않는 데다, 내가 하는 말이 길고, 어려워서, 듣기가 어려운지 할아버지는 자꾸 화를 냈다. 할아버지에게 내용을 전달하려고 발버둥 친 탓에, 내 목소리는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 그래. 목소리. 목소리가 너무 커도 잘 안 들린다고 했지. 나는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비료 350 포면 돈이 크잖아요. 직원이 나중에 안 받았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비료랑 퇴비 값은 통장으로 넣어 주-"          


  그때였다.          


  할아버지가 통장과 도장을 쥔 손을 휘둘렀다. 마치 복싱선수가 "쨉"을 날리는 듯, 날렵하고 강력한 펀치였다.

          

     쾅!


  다행스럽게도 그 손은 내게 닿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설치한 가림막이 아직 우리 사무실에는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의 주먹은 그 가림막을 쳤다. 가림막이 무너져 내렸다. 당황한 나는 그대로 굳어 눈만 끔뻑거렸다.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같이 온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할아버지는 화를 감출 수 없는 듯 씩씩거렸다. 그제야 책임자분이 창구로 뛰어나왔다. 아이고,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책임자분이 다가갔지만, 할아버지의 시선은 온통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 돈을 내가 찾겠다는데! 네가 뭔데 내 돈을 안 줘?! 어?!"     

  "어르신, 비료랑 퇴비 사신다고 하셨죠? 저쪽으로 오세요. 저쪽에 그걸 담당하는 직원이 있습니다."     

  "350포! 논이 400마지기야!"          


  책임자분과 어르신이 구매계(비료와 퇴비 등의 농자재를 취급하는 부서)로 갔다. 나는 벌렁벌렁한 가슴을 느끼며, 무너진 가림막을 다시 세웠다.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와 함께 온 젊은 남자가 재빨리 말하고 뛰어갔다.          

  "할아버지는 농사 안 지으세요."          


  ..... 뭐?     


  이게 무슨……?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신은 점차 몸집을 키웠다. 나는 가림막을 다 세우고 혼자 앉아 멍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 이후로 구매계에서도 큰 소리가 몇 번 났다. 물건을 사러 오셨던 손님들은 예상치 못한 장면에 당황해서 사무실을 떠났다. 그런 손님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하던 과장님이 가슴을 치며 내게 다가왔다. 내가 물었다.         

 

  "할아버진 가셨어요?"     

  "아니…. 350포를 꼭 가져가시겠대. 돈 주겠다고 난리다. 어르신인데 경찰을 부를 수도 없고…."          


  하아. 한숨 소리만이 사무실에 가득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해결되었다. 기어코 차에 싣고 가겠다던 할아버지에게 직원은 350포가 너무 많아서 가져가는 게 불가능하니, 우리가 배달을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할아버지는 몹시 노여워하시며 불만족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돌아갔다.


  다시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뒤에 계시던 또 다른 과장님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나보다 더 오래 이 지점에 근무한 상태였다.          


  "할아버지, 아세요?"     

  "작년에도 오셨어. 똑같은 내용으로."     

  "... 작년에도요?"     

  "치매가 엄청 심한데…. 봄만 되면 저래. 예전에 농사를 많이 지으셨나 봐. 봄만 되면 저렇게 찾아오셔 비료 산다고 해."          


  역시.     

  치매 셨구나.          


  시골에 살다 보면 노령 인구가 정말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 손님들의 대부분이 노인들. 그러다 보니 치매는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치매 손님을 응대하는 것도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만큼 서글펐던 적은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들 다 잊었다. 아내도, 형제도, 자식도, 예의도, 지혜도…. 모든 것을 잊고 요양원에서 하루하루, 그냥 산다. 꽃도 잎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살아는 있는, 아주 작고 오래된 삐쩍마른 고목처럼.          


  하지만 겨울이 가고 날이 풀리고, 비가 오면, 그래서 모두가 논밭으로 나가는 시기가 되면 할아버지도 깨어난다. 그 비가 할아버지의 뿌리도 적셔서, 농사를 지어온 그 기억을 되살린다. 평생 자신이 경작했던 400마지기의 땅. 그 땅을 일구기 위한 비료 350포. 그 계산법을 잊지 않고. 농협으로 오는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농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남아, 말라가던 그를 이렇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만약 다른 손님에게 이런 일을 겪었다면, 나는 손님에게 맞을 뻔했다는 것에 분노하고, 몹시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만은 짜증이 나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째서 치매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걸까? 무엇이 치매를 찾아오게 하는 걸까?      

    

  문득 인터넷 뉴스에서 보았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치매에 걸려 모든 기억을 잃고 옴짝달싹 못 하지만, 백조의 호수만 들으면 춤을 춘다는 전직 발레리나 할머니. 비료 350포를 외치던 할아버지 위로 그 할머니의 손짓이 겹쳐 보였다.


 두 사람 다 모두 누구 못지않게, 아니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만약 열심히 산 이유로 치매가 오는 거라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닐까? 아니면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라도 모든 걸 잊고 편히 살라고 치매가 오는 걸까? 우리는 항상 젊은 시절을 동경하고, 돌아가고 싶어하니, 그 꿈을 이뤄주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받기 싫은 선물을 억지로 쥐어주는 것과 같지 않나? 받기 싫은 선물은 과연 선물일까? 저주일까?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다시 오지 않는다.


비료를 배달시킨 것도 잊어버렸겠지. 농협을 왔던 것도 잊었겠지. 모든 걸 또 다 잊고 그렇게 지내다가 내년이 오면, 그래서 다시 농번기가 시작되면, 할아버지는 비료 350포를 사시겠다며 농협을 찾아오겠지. 아마 내가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면 나는 그 할아버지를 또 만나게 되겠지.


  그 발레리나 할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던가?

       

  치매로 모든 것을 잊은 할아버지가 찾아오는 일과 돌아가신 그 할아버지의 재산을 정리하는 일 중, 무엇이 더 슬플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Música para Despertar 유튜브 채널 영상 캡처

https://youtu.be/owb1uWDg3Q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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