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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Mar 19. 2023

8천만원, 현금으로 주세요.

전기통신금융사기

  그때는 ATM 마감을 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다급한 손길로 기계실 문을 두드린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선배가 보인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다. 

 

"손님이 8천만 원을 현금으로 찾는다는데, 너랑 이야기가 됐대. 맞아?"

"....네?"     


  불현듯 전화를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기계를 돌아보았다. 아직 마감을 못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기계 마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마감을 중단하고 급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선배의 자리 앞에 고객님이 서 있다. 선배가 내게 속삭이며 말한다.     


"너랑 통화했다고. 무조건 돈 주래. 그런데 아무리 생각도 이상해서 너 불렀어."

"제가 이야기 더 해볼게요."     


  당시 나는 모출납으로, 큰돈의 입출은 전부 내 소관이었다. 선배가 상황을 이야기하며 손님은 내 자리로 안내했다. 그가 말한다.     


"아까 통화했는데요. 8천만 원 필요하다니까,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왔는데…."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차분한 태도였다. 대화의 주제가 좀 그렇긴 했지만, 대화가 된다는 건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네. 기억나요.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이 저거든요. 그렇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현금을 찾으면 이유를 여쭤봐야 해요. 혹시 어떤 이유로 현금으로 찾으시는 거예요?"

"제가 필요하니까 그렇죠. 아까 분명히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여기 왔다고요."

"아. 다른 지점에는 없다고 하던가요?"

"네. 다른 지점 전화하니까 그만큼 현금이 없다고 해서 여기 전화 한 거예요. 여기는 있다고 해서 온 거고."     

  다른 지점에 먼저 전화해서 돈이 있는지를 확인했다고? 물론, 주 거래점이 있는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네. 저희가 본점이니까 다른 지점보단 약간 여유가 있죠. 그런데 진짜 어떤 이유로 그러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정말 너무 큰 돈인데."

"집에 인테리어 공사를 해요. 그 대금 줄려고 그래요.“

"그러면 계좌이체 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기록이 확실히 남잖아요. 줬니 받았니 나중에 뒷말도 없고. 영수증도 안 챙겨도 되고. 훨씬 편할 것 같은데."

"현금 주면 싸게 해 준다니까 그렇죠."     


  실제로 그런 업체들이 있다. 그래서 정말로 그런 이유로 현금을 많이 찾아가는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8천만 원을 현금으로 찾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습지만 내 촉은 이건 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 그렇구나. 업체 중에 그런 거 요구하는 곳도 있긴 하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큰돈을 어떻게 들고 가시려고 그러세요."

"오만 원짜리로 들고 가면 부피가 얼마 안 되잖아요. 여기 가방도 들고 왔어!"     


  그렇게 말하며 들어서 보여주는 건, 우산의 천 같은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접이식 시장 가방이다. 저 연약한 가방에 8천만 원을 현금으로 담아간다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오만원권 만든 사람 잡아서 멱살 잡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객에게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고객님, 진짜 죄송한데. 업체랑 통화 한 번 해볼 수 있을까요?"

"왜?"

"아니…. 수표는 진짜 안되는 건지, 제가 한번 여쭤보려고요."     


  손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사실 거절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뭔 개소리냐고 해도 할 말은 없는데…. 다행히 손님이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최신식, 새 휴대전화다.     

"와, 완전 새것 같아요."

"새것이지. 오늘 샀으니까."

"......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 나는 얼떨떨한 심정을 애써 숨기며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받아든다. 그런데 화면에 떠 있는 '금감원'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더 이상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금감원? 내가 아는 그 금감원???     

  심지어 금융감독위원회도 아니고, 금감원이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 귓가로 가져간다.     


"여보세요? 금감원이에요?"     


  휴대전화에 대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전화가 끊겼다. 하. 이것 봐라? 나는 마치 휴대전화가 사기꾼의 얼굴이라도 되는 마냥 노려보았다.     


"금감원?"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놀라서 다가온 책임자분께 나는 현 상황을 전달한다. 책임자분의 안색이 안 좋아진다.      

  그사이 나는 휴대전화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그런데 목록에는 금감원만 떠 있다. 통화목록에 아무도 없다고? 그럴 수가 있나? 그건 그렇고 발신자가 금감원이라고 이렇게 뜨나?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통화목록에서 금감원이 사라졌다.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있었는데, 없다! 세상에! 이런 세상이라니! 도대체 어디까지 핸드폰이 해킹된 거야?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얼마나 떨리는지 고객님의 새! 휴대전화를 떨어뜨릴까 두려울 정도였다.     

"고객님, 죄송한데, 괜찮으시면 안에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바쁜데 왜 그래요?"

"아, 사모님. 요즘엔 큰돈이 나가면 은행도 준비해야 할 게 많거든요. 안으로 잠시만 들어오세요."     


  책임자분께서 능청스럽게 응대한다. 고객님을 애써 설득해 안으로 모시던 책임자분이 통장은 어디 있냐고 묻는다. 나는 들고 있던 통장을 책임자분에게 넘긴다.     


“하아-”     


  답답하다.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부디, 설득이 원만하게 끝나야 할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마감하러 들어갔다. 아, 바쁘다.     


  그러나 대화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내가 기계 마감을 끝내고 손님을 몇 명이나 더 받고 나서야,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런데 손님의 표정이 밝지 않다. 책임자도 그 못지않게 어두운 표정으로 떠나는 손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어요?”     


  내가 슬쩍 다가가 묻는다. 책임자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 2G 폰 쓰는데, 오늘 사기꾼 전화 받고 휴대전화 바꿨대. 처음 스마트폰 쓰는 거란다. 카카오톡도 그 사람들이 깔라고 해서 오늘 처음 깔았대. 그쪽에서 우리 지점들 이야기하면서 전화해서 시재 여유 있는지 확인하라고 시켰단다. 만약 거기 없다고 하면 우리 쪽으로 전화 하라고 했고."

"....네???"     


아니, 이놈의 사기꾼들은 은행 사정마저 다 알고 있는 거야?     


"이 상황을 이해를 못 하셔. 그러니까 우리 말이 이해를 못 하지. 그래서 혹시 연락할만한 가족 있냐고 물었는데, 없데. 다 멀리 산데."

"아……."

"그래서 일단 우리는 못 준다는 것이 되었는데…. 가긴 가셨는데 걱정이다."     


8천만 원.     


이 돈을 모으려면 한 달에 100만 원씩 저축해도 7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 달에 100만 원씩 저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실적으로 50만 원씩 저축한다면, 13년 정도 걸린다.     


13년!     


  눈앞이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오지랖과 걱정을 견딜 수 없는 나는 가까운 지점에 전화를 돌린다.     

여보세요? 아, 여기 본점인데요. 오늘 저희한테 손님이 왔는데-     


  나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결론은?     

  혹시나 그 손님 그쪽 지점으로 가면 응대 좀 잘 해줘. 잘 살펴봐 줘! 제발!! 8천만 원을 구해줘!! 그 손님을 살려줘!     


  그 뒤로 그 손님은 다시는 우리 농협에 오지 않았다. 사기를 당했으면…. 신고하러 오셨을 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이 끝난 거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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