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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장을 아시나요?

농협 직원이 하는 일.

by 송쏭쏭

금요일 저녁, 마감을 하고 있는 내게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육묘장입니다. 쏭 대리님 맞으시죠! 월요일에 육묘장 당번이셔서 전화드렸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날 뵐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한다.

처음 듣는 목소린데? 경쾌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다. 한 번도 보지 않은 아르바이트생인데 느낌이 좋다. 육묘장 사람을 못 구해서 난리라더니, 좋은 사람을 구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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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장 (育苗場) [명사] 모나 묘목을 기르는 장소.

모 [명사] 농업 옮겨심기 위하여 기른 벼의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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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육묘장을 간다고 하자, 친구들은 말했다.


"왜? 묘목 살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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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에서 하는 일은 다양하다. 육묘 사업은 그중 하나다.


다양한 농산물을 농사를 짓지만, 여전히 시골의 가장 기본 농사는 벼농사이다.

이 벼를 기르기 위해서는 '모'가 필요하다. 이 모를 기르는 일은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고령의 농업인들에 직접 하기엔 매우 힘든 작업이다. 따라서 우리 농협에서는 이 모를 길러 필요한 농업인들에게 공급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이 일을 각자 집에서 했지만 요즘은 대부분 이렇게 육묘를 '사서' 농사를 짓는다. 일부 농가는 아직도 직접 육묘작업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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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장 지원은 크게 3가지로 이루어진다.


입상 : 모가 잘 자라도록 (벼를 뿌린) 모판을 잘 정리하는 일

출하 : (농가에게 공급하기 위해) 충분히 자란 모를 차량에 옮겨 심을 수 있게 옮기는 일.

회수 : 농가에서 사용한 모판을 찾아오는 일.


나는 여기서 입상과 출하만 해보았다.

각자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단점이 있다.


입상은 온몸을 많이 써야 한다. 흙먼지에 노출된다. 악, 눈에 먼지가!

출하는 들고 옮겨야 할 모판이 아주 무겁다. 물이 떨어져서 옷이 흠뻑 젖는다.

회수는..... 해보지 않아서 할 말은 없지만, 가장 어려운 일로 손꼽힌다. 모판을 회수할 때까지 그냥 무조건 온 동네 논을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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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 사업은 시즌업무이기에 지금부터가 5월 중순까지 가장 바쁘다.

때문에 다른 일을 보는 직원들이 육묘장에 가서 일을 도와준다.


각 지점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차출되는데, 오늘은 내가 나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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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육묘장 당번은 엄청난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내기1)'라는 것이다!


1) 돈내기 [명사] 공사를 할 때, 일정한 분량의 일을 단위에 따라 품삯을 미리 정하고 하는 것.




"이것만 하면 집에 갈 수 있다!"


다들 이른 퇴근을 위해 타오른다. 오늘은 다 고참들이 모였다. 베테랑들 담게 자연스럽게 조가 짜지고, 노동은 시작된다.


담당자가 외친다.


"이게 오늘 칩니다. 아, 밖에 조금 더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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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려 있는 모판을 저기 진열대(?)에 다 올리면 오늘 일이 끝난다!

업무 공백의 최소화를 위해 지점에서 한 명씩 차출되기 때문에, 만나는 직원들은 다 오랜만이다. 친한 직원이라면 수다꽃이 필 수밖에 없다.


"신규 때, 이거 엎으면 진짜 큰일 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아. 올해는 한판에 보조금 받으면 x원이죠!"

"보조금 빼면 n원이죠?"

"전 계산하기 싫어서, 육묘 명단을 그냥 받았어요!"

"전 그래도 계산해요!"

"아, 육묘장 계좌번호가 몇 번이었지?"


가만히 듣고 있던 상무님이 말씀하신다.


"아, 진짜 누가 농협 직원 아니랄까 봐 징그럽다."


웃음꽃... 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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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인부들을 못 구해서, 직원들이 고생을 더 많이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말을 하는 담당 직원의 얼굴이 어둡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요즘 인부들 구하기가 어렵지."

"일이 고돼서 나이 든 사람이 하긴 어렵고, 젊은 이들은 꺼리잖아."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여길 오겠어요? 편의점 알바를 하지... 이런 막노동은 저라도 하기 싫을 거예요."

"어쩔 수 없지, 직원들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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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상무도, 대리도, 계약직도 차이가 없다. 그냥 열심히 옮기고, 또 옮긴다.

"그러고보니 x농협은 모가 안커서 큰일이래요."

"담당자 마음 고생이 심하겠다."

"그런데 요즘 같으면 모가 커도 걱정이에요."

"비가 너무 안와서 그렇지?"

"요즘 가뭄이 심해서 큰일이야. 모내기는 하겠어?"

"그렇죠? 비가 정말 안 와요. 좀 와야 할 텐데."

"아, 문득 국사 시간에 조선후기, 모내기의 도입 부분에 나왔던 '가뭄에 취약하여 반발이 심했다'는 내용이 떠오르네요.

조선 시대 내용이 현재에 적용될 줄이야!!"


역사는 돌고 돈다.










드디어 다 옮겼다!

어디든 그렇겠지만 합이 중요하다.

높은 곳에 올리는 직원에게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한 속도로 전달해 주는 것.

다행히 이번엔 합이 잘 맞았다.


쉽게 줍기 위해 쪼그려 앉으면 무릎이 아프고, 바닥의 모판을 집다보면 허리가 쪼개질 것 같고, 높은 곳에 올리면 어깨가 아프다.


무릎과 허리와 어깨가 안 좋은 나는 곤란하다.


다행히 이번 조에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인 나를 잘 아는 직원들이 다수 분포되어 있어, 나를 잘 배려해 주신 덕분에, "이러다 쏭 너 내일부터 못 걸어다닌다! 쉬어!", 틈틈이 허리를 펴가며 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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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부실해 보이셔서, 오늘 안에 끝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어요!"


뼈를 때리는 담당자의 얼굴이 밝다. 다 죽어가던 직원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스친다.


"에이, 당연하죠! 이래 봬도! 저희가 육묘장 지원 경력이 몇 년인데요!"

"그렇죠! 막내인 저도 10년 째인데요?"

"허허. 내가 10년만 젋었어도 이 정도는 껌이지!"


자부심의 끝은 응석이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 오랜만에 한 육체노동에 고관절이 아프다. 내일 출근 못 하겠다. 산재처리 해주나. 증인은 누가 서나. 여기는 왜 cctv가 없나. 한 마디씩 내뱉는다.


그리고 눈치를 한번 쓱 보고, 모두가 동시에 외친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들 쓩,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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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몇 직원들과 밥을 먹으며 나름의 뒤풀이를 하고 '양파지원 갈 때도 같이 가자!' 집에 왔다.

오랜만의 육체노동으로 시달린 근육을 뜨끈한 물로 지지다보면(?) 얼굴과 코에서 흙먼지가 후드득 떨어진다.


머리를 감고자 팔을 드는데, 아이고, 어깨가 아프다. 그러고보니 손목도 아프고, 손가락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아마 한동안 고생하겠지. 그리고 한 달간 모든 직원들이 돌아가며 고생을 할 거다. 지원을 간 직원도, 남은 직원도 고생스러운 시간.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은, 이 일도 우리의 일. 내가 담당할 수도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담당은 몇 달을 매달리는데, 우리는 단지 하루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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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형 농협은 다양한 일을 한다.

농번기 시즌별 사업이 있는데, 육묘 사업은 4-5월에 집중된 사업.

그리고 앞으로 올해 몇 번의 시즌 사업이 더 넘았다.


아.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부정맥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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