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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Feb 04. 2024

거울 속에서 낯선 아줌마를 만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우리 사무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다. 청소를 해주는 여사님이 오시기 전까지 엉망이었던 그 거울은 여사님이 오시고 나서부터 새로이 태어났다. 과할 정도로 반짝반짝. 나는 거울을 잘 보는 편이 아닌데, 창구와 atm을 오갈 때면 항상 그 거울 앞을 지나게 된다. 어제도 그랬다. 나는 평소처럼 거울 앞을 지났고, 오늘도 참 거울이 깨끗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생각 없이 거울 속을 바라볼 때였다. 나는 그 속에서 낯선 여자를 보았다. 아주 창백한 표정을 한 아줌마였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그대로 걸어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을 쳐서 거울 앞에 섰다. 아까 보았던 그 아줌마는 사라지고 없었고, 늘 보던 여자의 얼굴, 그리고 아까 그 아주머니와 닮은 여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렇다. 그 아줌마는 바로 나였다.     


평생 노안이 콤플렉스였다.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아마 문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20대 초반에도 중반으로 보았고, 20대 후반에는 나는 ‘애가 몇 살이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내 콤플렉스였다. 엄마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좋게 말하면 ‘눈에 감기가 들었다’고 했고 기분이 나쁜 날은 ‘눈깔을 뽑아버린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말이 엄청 신경 쓰였다. 어째서 나는 예쁘지 않은 건지, 적어도 왜 또래처럼 보이지 않는 것인지, 싱그럽지 않은지, 왜 매일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힘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런 말에 조금씩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늙어 보이는 건 타고난 거고, 아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건... 그래. 어른들이 내 나이였을 때에는 아이가 하나 둘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나이가 드는 건 몰랐다.     


늘 거울을 보아왔지만 그렇게 늙고 창백해 보이는 모습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스스로 늙어가고 있다고 느낀 점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명백하게 시각적으로 ‘늙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나이가 이제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20대 때와, 아니 사실은 10대 후반일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처럼 철이 없고 생각도 모자라다. 완벽은커녕 흠집 투성이. 하루라도 실수를 하지 않는 날이 없고, 감정에 휩쓸리고, 후회하고... 아니, 생각은 그때보다 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때는 그게 내가 어른이라고 말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른스럽다’와 ‘어른이다’는 다르다는 걸. 나는 너무 일찍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진짜 어른은 되지 못했다.  

    

어른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피터팬은 외향이라도 어리지만 나는 외모는 늙어가는데 마음은 젊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른들을 생각한다. 지금도 몸만 늙어가고 마음은 그대로니까 앞으로도 그렇겠지? 50이 되어서도 70이 되어서도 마음은 10대이겠지? 그러니까 몸과 마음의 괴리는 더 커지겠지? 저기 한걸음 옮기기 어려워 보이는 저 어르신도 마음은 10대 때 그대로겠지? 아, 어째서 사람은 몸과 마음이 같지 않을까?    

 

거울 속 아주머니의 창백한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내 40대의 모습이 거기 있다. 어쩌면 50대의 모습일지도 모르지. 아, 얼굴이 진짜 창백했지. 얼굴에 윤기가 없다, 핏기가 없다는 엄마가 가장 자주 내게 하는 말 중 하나였다. 나는 그게 엄마의 ‘고슴도치 필터링’이 들어간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봐도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내 얼굴은 언제나 생기가 넘친다기보다는 병색이 완연한, 피로로 가득 찬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창백했다. 다른 화장은 몰라도 볼터치는 좀 하고 다니는 게 좋을까?  

   

화장을 하지 않았다. 특별히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다. 말은 못 했지만 평생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화장한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장을 잘할 만한 기술도, 화장을 잘하려고 노력할 자신도, 그리고 화장품 이것저것을 얼굴에 올려볼 자금도 없었다. 그런데 하지 않는 것이 너무 편하네? 그러다 보니 화장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내게 입술이라도 좀 바르고 다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수많은 콤플렉스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콤플렉스는 입이다. 돌출입은 내 콤플렉스 중의 최고 봉이다. 어린 시절, 오빠가 내게 ‘주먹으로 주둥아리를 (때려서) 넣어넣어주겠다’고 했던 일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내 입이 싫었다. 성인이 되어 만난 회사 언니는 내 입술이 ‘마치 입꼬리 수술을 한 것처럼 (예쁘게) 올라가 있다’고 말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입이 튀는 것이 싫었다. 색을 입히면 더 부각이 되어서 내 입이 튀어나온 것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입술이 엄청 많이 텄다. 입술에 색조를 올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색조만 올리면 내 입술이 미친 듯이 갈라지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입술은 바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볼터치만 할까? 그런데 피부가 깨끗하지 않으면 볼터치를 해도 티가 안 날 것 같은데? 나는 피부 결은 꽤 좋은 편이라 생각하지만, 대신 모공이 제법 크다. 귤껍질 같은 내 피부 위에 색조 가루를 올리면 모공 사이사이 끼어들지 않을까? 시커먼 얼굴에 색조를 올려도 티가 안나는 건 아닐까? 아, 그러면 피부 화장도 좀 해야 할까?     


아, 이래서 나이를 먹으면 다들 화장이 진해지는 것일까?     


몇 년 전, 후배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도 생얼이었고, 나 외에 생얼로 온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그중엔 나이가 많은 분도 계셨는데, 직원분 중 한 명이 그분을 보며 “뭐라도 바르고 오지”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걸 들으며 ‘그래. 마흔에도 생얼로 다니는 건 아니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마흔이 코앞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얼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내 늘어진 모공과 탄력 없는 피부가 부끄럽지만, 그보다 내가 화장을 시도하면 얻게 되는 결과물, 즉 팔자 주름사이에 낀 화장품과 갈라진 입술 위에 얼룩덜룩 남는 색조가 훨씬 더 부끄럽기 때문이다.     


화장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아마도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살 수 있는 정도 필요하고, 고도의 손기술을 익힐 정도로 꾸준히 연습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부지런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다들 이런 힘겨움을 극복하고 화장을 하는 것이다! 아, 다들 어떻게 그걸 해내는 거지?    

  

역시, 어른인가?  

   

어른이라면 힘든 일도 해내야지. 편하고 쉬운 일만 찾는 것은 어린아이의 자세다. 마음과 육체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서 괴롭다면, 그걸 좁히는 길은 마음을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어른의 마음이라는 것은 힘든 일도 견뎌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이제는 화장을 시작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만 얼굴에 생기를 돌게 하는 건 화장뿐이 아니잖아?     


어려운 일을 함으로써 어른을 증명해야 한다면, 부지런한 생활이나, 건강한 식생활, 규칙적인 운동도 하기 어려운 거잖아? 거울 속 아줌마의 얼굴에 생기가 없어서 문제라면, 무언가의 기쁨으로 생기를 띄게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도리어 볼터치를 택하는 것이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웃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 ‘쉬운’ 선택이 아닌가? 세상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그렇게 화장 계획은 다시 미뤄버리고,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나. 이제는 마흔이라고 화장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생각도 든다. 도대체 마흔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내가 필요할 때,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지. 어른이란 자기 합리화를 굉장히 잘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규칙을 바꾸는 것은 반칙이 아닌 어른의 처세술 중 하나.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간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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