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일상의 행복
몇 년 전, 문득 삶이 좀 지루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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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특별하고, 신선한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에서 지루함이란 마치 죄악과 같은 감정이니까. 나는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게 사는 편이었으니, 지루함이라는 토핑까지 얹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도 살짝 들었다. 매일매일이 특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특별한 일이 생겨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런 나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언제부터 ‘이런 걸’ 지루하다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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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확히는 그때부터, 내 삶은 안정기에 들어갔다고 봐도 좋다. 인사이동으로 나를 괴롭히던 직장 상사와 떨어져 새로운 지점으로 옮긴 나는, 마치 그때까지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받듯이, 나와 잘 맞는 직원들과 일하게 되었다. 거의 처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고, 퇴근 후 직장동료들과 한 잔 하며 일의 고됨을 해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대학시절부터 나를 옥죄고 있던 학자금 대출을 드디어 다 갚았고. 어린 시절부터 가고 싶었던 터키에 다녀왔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지루하다는 건, 행복하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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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어려울 때는 지루할 틈이 없다. 계속해서 터지는 사건들이 지루함을 생각할 틈 따위를 주지 않는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했고, 내가 해내야 하는 것들이 내 목을 죄어온다. 그럴 때는 한가할 수가 없다.
내 직속상관이 나를 괴롭힐 때, 나는 지루하지 않았다. 괴로웠고 그 괴로움에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나를 사로잡았고 때로는 그녀의 비난이 정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괴로웠다. 나 혹은 가족들이 아플 때는 정신이 없었다.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감당해야 하는 병원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지루함따위는 떠올릴 틈도 없게 만들었다.
내가 지루하다면 그건 지금 나를 괴롭히는 어려움들이 없는 것이다.
삶의 괴로움이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지 안다. 화가 나고, 짜증 나고, 마음이 쓰이고, 괴로운 일들은 너무나 자주 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하는 날, 울지 않고서는 출근하지 못하는 날은 얼마나 쉽게 찾아오던가? 그러니까 지루함을 느낄 정도의 일상은, 평화로움의 최절정의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나날인가?
그 깨달음 이후, 내 삶은 크게 변했다.
일단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휴일만 생기면 강박적으로 어디론가 가려고 하던 나는 이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행복은 늘 찾아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랑새처럼, 언제나 내 곁에 행복이 있음을 알기에. 나는 늘 가던 운동을 가고,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휴대폰을 만진다. 그냥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물론 나도 인간이라, 너무 평화롭다 못해 멍하게 보내서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날도 분명 있다. 쇼트를 15시간 정도 본 날은 특히. 하지만 너무 나를 미워하지 않고,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하며 웃어넘기려 한다. 왜냐하면 그 행동들이 그 순간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바쁜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하고 싶은 걸 찾는 걸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바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행복한 일로 바쁜 경우도 많다. 그건 또 그때만의 즐거움이 있다. 그저 아는 것이다. 지금처럼 지루함에서 오는 행복감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