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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역사

삶과 죽음

by 강인한

세 살 때, 할머니 집에서 있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불투명한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톡.. 톡..‘ 떨어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나는 옆에 계시던 할머니께 여쭤봤다.


“할머니 이게 무슨 소리야?”


할머니는 무서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창 밖에 개구락지(*개구리의 방언) 아저씨가 있다. 말 안 듣는 아이들 있으면 잡아간다.”


순간 그 모습이 너무나 직관적으로 떠올라서 나는 그만 이불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부모님은 내가 밤에 잠을 자려하지 않으려 하고, 떼를 쓸 때면 ‘세탁기 아저씨’를 들먹이곤 했다. 세탁기 아저씨는 단순히 세탁기와 아저씨를 합친 별 의미 없는 단어다. 그러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워낙 크기도 했었고, 그것의 용도를 명확하게 인지를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겐 마냥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나쁜 행동을 하면 상상 속의 괴물들이 나를 잡아갈 것 같았다. 가족들 눈에는 내가 귀엽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두려움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두려움은 내가 자랄수록 똑같이 커졌다. 그것은 더욱 정교하게, 그리고 기괴하게 다가왔다.

‘개구락지 아저씨’ , ‘세탁기 아저씨’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처녀귀신 등의 미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혼자 잘 때마다 방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자곤 했다. 나중 가서는 방 문을 여는 것도 불안해서 ‘천장 위에서 무언가 나를 내려다보면 어쩌지?‘ ‘창 밖에서 귀신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등의 고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나는 마치 관짝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정자세로 자게 되었고 그 자세는 지금까지도 습관으로 남아 이어져오고 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차라리 개구락지 아저씨가 그리울 정도이다. 더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대신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잘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어려움 등 너무나도 현실적인 두려움들이 내게 다가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항상 도망 다니고, 두려워하고, 피하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두려움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기 시작했다. 정말 사소한 이유로 시작된 고민은 꽤 오래갔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나름의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또는 생존에 대한 욕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죽으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죽고 나면 다 놓고 가야 하니까.


가끔 죽음을 앞두고 용기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상황이 오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그 상황에 나를 놓는다. 두려움이 밀려든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두려움을 마냥 극복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거부할수록 더 큰 그림자로 다가왔고 곧이어 그 방식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려움에 패배할수록 스스로의 가치도 떨어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내려놓기로 했다. 두려움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하니 오히려 두려움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제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죽는 건 싫다. 아직은 내 주변에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두려움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어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젠 더는 피하지는 않는다. 대신 언제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주변을 더 소중하게 바라보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면서 하루라도 더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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