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
우리 아빠는 체격이 큰 편이다. 키도 나보다 조금 더 크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초등학교 때 아빠랑 함께 목욕탕을 가던 순간이 기억난다. ‘새해가 밝았으니’, ‘외할머니 집에 가게 되었으니’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가서 목욕을 하곤 했다.
온탕에 물을 담그고 나면, 아빠는 항상 때밀이로 내 등을 밀어주셨다. 당시 아빠의 체격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작았기에 때밀이가 시작되면 손짓 몇 번에 때밀이가 순식간에 끝나곤 했다. 어린 마음에 자존심이 상한 나는 ‘나도 아빠의 등을 밀어주겠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지만 그 조그마한 손으로 아빠의 넓은 등을 밀어주기엔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목욕이 끝나고 나면 아빠는 칡즙을 마셨고, 나는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손을 잡고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아빠랑 목욕을 가는 게 부끄러웠다. ‘목욕’이란 행위는 어디까지나 나만의 독립적인 행위라고 생각했고, 한창 자라고 있던 내 몸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싫었으며 목욕탕이란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하러 가는 장소라고 생각했던 어린 날이었다. 그렇기에 그 당시에는 목욕탕도 잘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욕조에서 홀로 목욕을 즐겼다. 지금생각해 보면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어린 시절의 나보다 더 어렸던 것 같다. 자라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군 입대를 하는 어느 봄날의 새벽. 진주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가족들과 같이 자고 일어난 날이었다. 외할머니 집에는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았기에 나는 아빠와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아빠와 어렸을 때 자주 갔던 곳이었다.
나는 두 가지 모습을 보고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목욕탕의 크기였다. 어렸을 때 막 완공되었던 최신 목욕탕은 나만의 작은 테마파크였다. 냉탕 끝에서 끝까지 가는 것도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고 냉탕 천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폭포수와도 같았다. 그러나 다 자란 성인의 시야에서 보이는 목욕탕은 너무나도 작았다. 냉탕에서 몇 걸음 걸어가면 끝까지 닿았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좋은 마사지 기계로 전락해 버렸다.
두 번째로는 아빠의 등이었다. 그렇게 넓어 보이던 아빠의 등은 언제부턴가 커져버린 나의 손으로 손쉽게 밀어줄 수 있었다. 반면 아빠가 내 등을 밀어주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렸을 때 아빠가 밀어주고 나면 등이 새빨개져서 너무 아프게 밀지 말라고 투정 부리곤 했는데, 아빠의 힘이 약해진 건지 내가 고통을 견디는데 익숙해진 건지는 몰라도 마냥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아빠도 나처럼 시간의 흐름을 느꼈을까? 작기만 했던 아들의 입대날, 목욕탕에서 다 커버린 아들에게 등을 밀리는 아빠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엔 아직 나에게는 이르겠지.
하지만 하지만 언젠간 나 또한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목욕이 끝나고, 우리는 냉장고 앞에서 어떤 음료를 마실지 고민했다.
아빠는 수년이 지났음에도 목욕이 끝나면 항상 칡즙을 마시는 것은 여전했다. 바나나우유를 마셔볼까 했지만, 이번에는 큰맘 먹고 나 또한 칡즙을 같이 마셔보기로 했다.
쓴 맛이 났다.
아빠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