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관점
눈사람 자살사건이란 글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의 동심의 대상인 눈사람과 자살이라는 행위는 동시에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자아가 생긴 눈사람이 하는 첫 행동이 자살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삶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눈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내 시선에서 바라본 눈사람의 입장이다.
눈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추운 겨울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지도 못하며 무척이나 쓸쓸했을 것이다.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다가오는 따뜻한 봄을 맞이할 것이다. 산뜻한 봄바람과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계절까지 눈사람은 살 수 없다. 그의 죽음은 겨울에 머물러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눈사람은 욕조 안에 있었다. 차가운 물을 틀지, 따뜻한 물을 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는데 처음으로 갖는 선택의 자유는 자살이라는 행위의 부조리함을 잊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눈사람은 고민했다. 차갑게 차갑게 오래 살지.
한 순간의 따뜻함을 다시 한번만 느껴보고 물이 되어 사라질지.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나라면 어떤 물을 틀었을까?
마침 그날은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눈사람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눈사람이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리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눈사람 주변에 있는 눈들은 녹아 없어졌지만 눈사람은 홀로 남아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눈사람은 형태는 조금 작아졌을 뿐 녹지 않은 채로 있었다.
어느새 나는 눈사람이 녹지 않기를 응원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나의 눈이었으면 금세 녹아버렸겠지만, 그 눈들이 서로 모여 하나의 눈사람이 되었고, 뭉친 눈들은 쉽게 녹지 않았다.
참 대견했다.
그제야 내 선택의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난 물을 틀지 않는다는 선택을 할 것이다.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내 자유다. 내가 물을 틀어버려 자살이라는 선택을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일 것이다. 나는 그 시선에 대한 저항을 할 테다. 내 인생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과 그 시인에 대한 저항을 할 테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아 예쁜 하늘과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것이다.
결국, 눈사람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눈사람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지만
눈사람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도 나였고,
눈사람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나였다.
혹여나 눈사람이 자살을 하겠다는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해 줄 것이다.
그 글을 읽고선 눈사람을 불쌍하게 여겼던 생각이 나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주변에 큰 나뭇가지 두 조각을 주섬주섬 챙겨선 눈사람에게 팔을 만들어주었다.
적어도 나는 네가 존재했음을 오랫동안 기억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