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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무덤들

나를 기억해 주세요

by 강인한 Jan 25. 2025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의 끝에 도착하게 된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면 우리 증조할머니의 산소(山所)가 나온다. 나는 멀리 살고 있어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성묘를 가는 편이다.


증조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 중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셔서 주변 사람들에게  ‘왕할머니’라고 불리셨다. 삶의 기복이 참 많은 분이셨지만 항상 아낌없이 베푸시던 분이었다. 그 힘든 일제강점기를 버티시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부산에서 풀빵장사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남는 돈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의 손에 대가 없이 쥐어주셨다.


우리 왕할머니는 어릴 적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얼마나 예쁨 받았으면 아빠가 캠코더를 처음 집에 가져온 날 찍었던, 할머니 옆에서 용돈을 받기 위해 애교란 애교는 다 부리던 내 모습이 영상 속에 남아있다. 또한 동물원에 처음 가보셨던 이야기를 캠코더 앞에서 말씀하시던 왕할머니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셨던 왕할머니와 나이가 가장 어렸던 나. 그런 인연이기에 내가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앞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도 설날을 맞아 새우깡 한 봉지와 소주 한 병을 들고선 왕할머니의 산소에 찾아갔다.

산소는 산 제일 위쪽에 위치해 있는데, 올라가기까지 몇 개의 무덤들을 지나쳐야 한다. 그 무덤들은 참 특이하다. 무덤은 무덤인데 묘비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관리가 그래도 되어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무덤의 형태도 알아볼 새 없이 풀로 뒤덮여버렸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사람들에게 잊힌 무덤들이었다.


왕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남은 소주와 새우깡을 종이컵에 소박하게 담아 잊힌 무덤 쪽에 두고선 잠깐의 묵례를 했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 한 행동이었다. 첫째로 왕할머니 산소 앞까지 가려면 잊힌 무덤들을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다. 누군가의 안식처를 방해한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과 동시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고, 두 번째로는 누군가에 잊힌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이기적인 동정심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coco)’가 있다. 멕시코 배경의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영화에선 이승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어야지만 저승에서도 존재를 할 수 있는 설정이 붙어있다. 즉, 이승에 본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내 존재 자체가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중간에 잊혀서 저승에서도 소멸된 사람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이 마냥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세월이 지나서 내가 죽어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이다.

이왕 죽어서 다른 사람의 기억에 남을 거라면 우리 왕할머니처럼 좋은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고 싶다.


묵례가 끝나갈 때쯤,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선 나뭇잎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히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섬주섬 쓰레기들을 챙겨 산을 내려갔다.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떻게 묻히게 되었고 왜 잊히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적어도 오늘부로는 잊힌 무덤들은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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