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색깔
어렸을 적,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많은 것들이 변했다. 밝을 때 인지하지 못했던 사소한 물건들도 어둠 속에서 그 존재감을 더욱 크게 드러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귀신으로 보였고, 창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는 누군가 나를 깨우기 위한 노크소리와도 같았다. 어둠은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주었다. 매일 밤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생각이 나를 잠식했던 것 같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은 단순한 옷이었고, 창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기온차로 인해 들려오는 소리였을 뿐이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두려움이 그것들을 상상 속의 괴물로 만들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언가를 보았을 때 그 무언가를 제대로 보았다고 인식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제대로 보았다’라는 착각은 물건에도 해당되지만,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한 판단, 세상에 대한 판단까지 이어지게 된다. 잠에 들기 전 내가 봤던 무언가는 어렸을 때 우연히 티브이에서 보았던 귀신이었으며, 누군가의 괴담이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무언가를 보았다는 말은 더는 맞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본 세상의 색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라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그 과정에서 자라난 자신의 자아는 색안경으로 바뀌어 우리를 각자 고유의 색깔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이 과정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다. 사람들의 색안경 색깔이 다양해질수록, 다양한 관점과 시각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것은 누군가에겐 교훈이 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자신만의 시각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내가 보는 세상은 누군가에게는 다른 색깔로 보일 수 있다. 내가 겪어온 경험들은 지금의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겠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방식이라는 확신은 없다.
확신은 없다. 다르게 말하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맥을 같이한다. 한 색깔로 살아가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조금 더 다채로워질 것이고, 내 시각에 여유가 생길 것이며, 각각의 단색이 섞이며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내듯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넓어지게 된다.
‘내 말이 맞아, 네 말은 틀렸어’라는 방식은 지양하고 싶다. 이러한 방식은 서로의 감정 소모만 커질 뿐이고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나의 시간을 쓰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다. 물론 그러한 필연적인 충동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그런 확률에 내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조금 더 유연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말도 맞을 수 있겠지만 네 말도 맞을 수 있겠네.’라는 방식이 사람들의 주된 대화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각을 합쳐, 합의점을 어느 정도 도출하게 된다면 조금 더 세상을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본질을 모두와 공유하게 된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아갈만한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