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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무석 Aug 22. 2022

세무사까지 5,500시간_조금 긴 합격 수기

20살의 시작_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무사 합격 수기이다.

그날의 기억, 그날의 생각을 담았다. 과거 내가 했던 선택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후회도 걱정도 기쁨도 모두 함께인 이야기이다.

그건 2007년부터 시작한다.


2007년 2월. 나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남대교를 건너면서 당찬 각오를 수 없이 되뇌었다. 이것은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대구 청년의 이야기이다.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대구는 답답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고, 그곳이 서울이라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자고 생각했다. 우등생은 아니었으나 서울에 올라올 수 있는 수능 점수는 되었었나 보다. 서울에 계셨던 외삼촌이 고시원을 잡아주셨다. 발 뻗으면 책상에 부딪히는 그곳에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키가 큰 편이라 한동안은 자면서 발을 많이 부딪혀야 했다).


2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경영학부 학생들이 모여 신입생들을 축하해주었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경영학과 선배가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섰다. 이야기하기를, 학교생활을 하면서 선배들과 어울리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지금도 기억날 만큼 큰 액수였다. 서울에선 인간관계를 돈 주고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땐 순진했었다.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서면 그만일 것을. 내 얼굴을 보면서 돈을 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들을 나는 한동안 피해 다녀야만 했다(돈으로 일그러져 있는 학생회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해서 올라온 서울.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무엇이 성공인지는 스스로 정의 내려 본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서울로 가면 길이 보일 것만 같았다.

그 당시 집에서 적지 않은 돈을 생활비로 보내주셨다. 하지만 차마 송구스러워 쓰지를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렸다.

학생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점심시간 약 2-3시간을 일하고 식사를 제공받았다. 시급은 5,000원 정도였다. 대구 시내에서 식당 아르바이트 시급이 2,800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굉장했다.

학생들이 몰리는 시간대에 식판을 닦고 세척된 수저와 식판을 옮기는 단순한 일이었다. 앞치마를 입고서 일을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질적인 경험이었다. 2시 즈음이 되면 학생들이 줄어들어 일하는 알바생들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수요일의 알밥은 꿀맛이었다.  두 그릇을 꾸역꾸역 먹어두면 든든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날은 저녁 밥값이 굳어서 더욱 좋았다. 


무대 설치나 철거 용역도 자주 나갔다. 학교 축제 시즌이 되면 일이 넘쳐났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거슬러 무대로 올라가 철거를 시작했다. 그때의 갈증이었을까 나중에 한창 수험공부를 할 때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공연을 관람했다.

새벽녘에 동트는 무대 위에서 목장갑으로 닦아내는 땀은 개운했다. 건실한 마음이 움텄다.


주말이면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코스 요리가 나오는 예식장에선 고급 음식이 대게 멀쩡한 채로 반납되곤 하였다. 주린 배를 고급 음식으로 몰래 채울 때는 부끄럽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달콤한 음식이 혀를 놀리는 맛에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시간이 날 때면 무료 강의를 신청해 들으며 다니곤 하였다. 자기 계발 강의나 사회, 경제 관련 강의였는데, 서울은 그런 점에서 기회가 많았다.

내가 원하는 방향만 올바르게 설정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는 곳이었다.

시험이 끝나거나 작은 쉴 틈이 생기면 이촌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자주 들렀다. 하루는 신라의 금관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하루는 종루를 바라보았고, 하루는 호수 위의 오리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호사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깨가 아파 와서 학교 정문에서 쓰러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100여 걸음의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서 집까지 까매진 하늘을 걸음을 멈추면 무너질라 조마조마해진 가슴을 고이 감싸 안아 고시원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틀을 잤다. 일어나니 아득했다. 100m 달리기를 하다 숨이 막혀 결승선을 통과한 후에야 숨을 토해내는 듯했다(하늘이 까매졌다. 그것이 철분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빈혈의 일종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삶이 충만해지지 않았다. 방향 설정이, 목표의 설정이 없었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지, 어떤 직업이 나를 기쁘게 할지, 나의 선호는 어떠한지 아무것도 몰랐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로 군입대를 신청했다. 한 번 떨어졌다. 그 후 지원 비율이 가장 낮은 수리부속보급병을 지원했고, 2007.07.02.로 입대일자를 받았다.

학기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 말했다.

“엄마, 내 다음 주에 군대간데이.”

나의 서울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꿈과 희망이 가득할 것 같던 서울은 꿈을 파는자와 꿈을 먹는자들에게 뒤섞여 파사삭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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