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1

-다음 생은 교사가 아닙니다. 4-

by 휘리

이번에도 또 고3 담임이 되고야 말았다. 올 한 해만 고3 담임이 아닌 다른 학년 담임교사를 원했는데 그렇게 묵살되고 말았다.




아빠는 10년 동안 폐암으로 두 번의 수술과 수십 번의 항암 치료를 받으셨다.

2004년 4월 교통사고로 인해 아빠의 폐에 큰 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 처음 의사의 진단은 혹이 크지만, 수술로 떼어낼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사의 말만 믿고, 천진난만하게 교통사고로 인해 병을 알게 되었으니 천운이라고 안도하였다.


그러나 막상 아빠의 가슴을 열어 보니 그 혹은 암이었고, 주변에 전이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닫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아빠의 투병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행히 항암 치료가 잘 되어 아빠는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셔서 병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이된 암세포들은 끈질기게 아빠를 괴롭혔다. 수많은 항암 치료로 인해 아빠의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하셨다. 그래도 아빠는 그 힘든 치료를 너무나 잘 견뎌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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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이 되면서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더 이상 치료가 힘들다고 퇴원을 권하는 병원들 틈에서 치료할 항암제가 있다는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계속했다. 다행히 병원이 언니와 오빠네가 있는 일산이어서 상계동에서 다니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빠는 독한 항암 치료로 인해 갑자기 저혈당 쇼크가 수시로 왔고, 아빠에게 위급한 상황이 수도 없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빠와의 마지막을 본능적으로 느꼈나 보다. 이런 사정을 관리자들에게 얘기하면서 한 해만 고3 담임을 거절했는데.... 또 고3 담임이 된 것이다.


7월 말이 되면서 아빠는 자가 호흡조차 너무 힘겨워하셨다. 산소호흡기와 비슷한 기구의 도움을 받아 호흡을 하는 아빠는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시고, 온몸이 부으셔서 일상생활이 힘드셨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영양제로 하루하루를 버티셨다.


고3 담임이었던 나는 여름방학이었지만 일산과 상계동인 학교를 오가면서 보충 수업을 했다. 오후에는 서둘러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고, 수시 상담을 했다. 종합전형을 쓰는 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재촉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 약속한 기한을 넘겼다. 마음이 조급했던 나는 솔직하게 학급 아이들에게 나의 상황을 얘기했다.


“선생님, 친정아버지께서 지금 많이 위급하셔. 언제 선생님이 상을 당할지 몰라. 그런데 너희는 고3이잖아. 내 개인 사정 때문에 너희가 피해 보면 안 되잖아. 그래서 지금 서두르는 거야. 방학 때 생활기록부, 자기소개서, 담임 추천서 다 마무리해야 하니까 너희도 협조해줘야 해.”


아이들도 내 사정을 이해했나 보다. 아이들 덕분에 8월 말까지 생활기록부 수시 자료 마감, 학생과 학부모 수시 상담, 자기소개서 검토 및 수정 작업, 담임 추천서 등의 일들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주말에야 겨우 아빠 병실을 지키면서도 나는 학생들과 수시로 전화했다. 전화하면서 노트북으로 연신 학교 일을 하기 바빴다. 병실을 지키면서도 아빠를 돌보거나 아빠의 죽음 앞에서 마음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아빠는 내가 매 순간 불효를 저지르는 와중에도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으셨다. 아빠의 상황이 워낙 위급하였기에 개학했지만 나는 일산과 상계동을 출퇴근했다. 저녁에도, 새벽에도 아빠가 위급한 상태에 빠지셔서 가족들이 병원으로 급히 뛰어가기를 반복했다.


‘아빠,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아직은 안 돼요. 아직은 할 일이 있는데... 아직은 정말 안 되는데....’


나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아빠 병실로 급히 뛰어가면서 이런 불경(不敬)한 생각을 했다. 아빠의 딸이라는 나라는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아빠와의 이별을 아파하는 마음보다, 아빠의 죽음에 슬퍼하는 마음보다 이런 말도 안 되면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행히 아빠는 여러 고비를 잘 버텨주셨고, 나는 생활기록부 수시 마감, 수시 상담, 자기소개서, 담임 추천서, 수능 원서 작성 등의 일을 마무리했다.




그러고 9월 첫 번째 일요일 아침 9시가 못 되는 시간 아빠 병실을 지키셨던 엄마께서 전화하셨다.

“애들 데리고 빨리 와라. 빨리 와야 해.”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셨다. 우리는 급히 병원으로 뛰어갔다.


한 달 넘게 식사를 못 하셔서 너무 삐쩍 마르셨던 아빠, 숨 한 번 편히 쉬고 싶어 하셨던 아빠, 의식이 있으실 때면 손주들을 너무나 보고 싶어 하셨던 아빠....


10년 동안 힘든 투병 생활을 짜증 내지 않으시고 묵묵하게 견디셨던 아빠는 너무나 화창한 아침에 그렇게 가족들을 떠나셨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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