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막내딸 냥이(엄마 이야기 1)-
아빠의 10년 암 투병을 꿋꿋하게 옆에서 간호하신 엄마. 처음 아빠 폐에 큰 혹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우리가 걱정으로 한숨만 쉬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시고, 수술을 앞둔 아빠를 챙기신 분이 엄마셨다. 수술 중 큰 혹이 암이라는 것을 알고 열었던 아빠 가슴을 그대로 덮고 나온 의사에게 폐암 3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을 때도 가장 먼저 눈물을 훔치시고, 아빠의 힘듦을 옆에서 고스란히 받아내신 분이 엄마셨다.
엄마는 전형적인 유학자 집안의 종손인 외할아버지의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나셨다. 전형적인 유학자 집안의 종손인 외할아버지께 아들이 없다는 것.... 여러분이 짐작하신 그대로이다. 외할머니는 평생 아들에 대한 회한으로 가슴이 멍드셨다. 네 명의 딸들이 아들을 출산할 때마다 누구보다 기뻐하시면서 딸들의 산후조리를 도맡으셨다. 외할머니께 아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산이자, 보물이었다. 외할머니는 어릴 때 덩치가 좋고, 먹성이 좋았던 나를 보실 때마다
“저것이 고추를 달고 나왔어야 하는데.”
하시면서 못내 아쉬워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얼마나 싫던지 나는 외갓집에 가기 싫어했다.
엄마는 점잖은 유학자 선비이신 외할아버지를 지금도 존경하신다. 딸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시집을 잘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신 외할아버지는 중등 교육을 받고 싶어 했던 엄마를 포함한 세 명의 딸을 중학교에 보내지 못하셨다. 이모 중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분도 있기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해 엄마는 큰 불만을 갖지 않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선택을 여자에 대한 불평등이 아니라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막내 이모를 중등 교육까지 교육시키신 것을 보면 엄마의 생각이 맞는 것도 같다.
아빠가 첫 수술을 못하시고 항암제 치료를 먼저 하실 때, 아빠가 퇴원하시면 엄마는 아빠의 체력을 회복하게 하시려고 종일 움직이셨다. 항암 치료하실 때 고단백을 섭취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신 엄마는 장어며, 소고기, 오리 등을 아빠의 끼니마다 준비하시고, 항암에 좋다는 약초로 물을 끓이셔서 아빠가 계속 마실 수 있게 하셨다. 인근 야산에서 민들레를 캐셔서 직접 민들레김치를 담그시기도 했다. 엄마의 건강도 걱정이었던 우리가 엄마에게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잔소리해도 엄마는 멈추지 않으셨다. 종일 아빠 옆에서 간호하시면서 아빠의 힘듦을 다 받아내신 엄마는 간혹 나하고 저녁 식사 후 산책하면 그때서야 자신의 고단함을 말씀하셨다.
엄마의 고단함을 듣고 있던 내가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지금 내 나이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지금 네 나이가 서른 하나인가?”
“네.”
“서른 하나라.... 그러면 난 공부하고 싶다.”
“네? 겨우 공부요?”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애들이 부러웠어. 너희가 늦게까지 공부하면서 힘들어할 때도 그렇게 안쓰러운 데 또 부럽기도 하더라. 내가 지금 서른이면 공부해서 대학 갈 거 같아.”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오후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하고, 집에 와서 TV로 EBS 강의 들을 때 뜨개질을 하시면서 내 옆을 지켜주셨다. 내가 독서실에서 새벽 1시까지 공부하고 늦게 집에 들어올 때도 엄마는 눈을 비비시면서 나를 맞아주셨다. 그때 나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엄마에 대한 감사함도 모르고 짜증만 부렸다. 그런데 엄마는 공부해서 대학 가고 싶으시다고 하신다. 엄마가 이런 생각을 하시는 줄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엄마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걸음만 옮겼다. 엄마는 마음에 맺히신 회한을 말씀하셨다.
“너희 셋 가르치느라 여유라고는 전혀 없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오셨어. 아빠는 일 나가시고 내 수중에 몇 천 원도 없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있는 반찬으로 외할아버지 점심을 차렸어.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는 고사하고 생선 한 마리도 없지 뭐야. 계란 프라이를 급히 하고, 김을 구워서 있는 반찬으로 상을 차려서 내놨지. 그 상이 얼마나 초라하던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에 오신 적이 거의 없으시다. 간혹 오시더라도 자고 가시지 않고 바로 가셨다. 어린 내 마음에도 외할아버지께서 좁은 집에서 다섯 식사가 복잡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오래 있으시지 못하고 일어나시는 것이 보였다. 어린 내 마음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엄마는 오죽하셨을까?
“식사만 겨우 하시고 외할아버지께서 일어나시는데 잡지도 못했어. 차비라도 드리고 싶은데 돈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렇게 외할아버지께서 가시고 나니 눈물이 저절로 나더라. 그때 돈도 안 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집안일 말고 돈을 벌고 싶었어. 그래서 당당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용돈도 드리고...”
엄마의 희생으로 우리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았나 보다. 엄마의 인생을 갉아먹으면서, 엄마의 눈물을 짐작도 아니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제 잘난 맛에 이렇게 뻔뻔하게 잘 살았나 보다.
나는 그 옛날 엄마와 산책하면서, 서른 하나가 돼서야 비로소 엄마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