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어느 날, 16.5㎞ 서울 둘레길 7코스 완주를 6시간 예상하고 우리는 가양역에서 만났다. 작년에 해파랑길 20㎞를 거뜬히(?) 완주한 나로서는 이번 코스 정도는 걱정도 안 되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한 번 해봤다고 이번에는 걱정은 고사하고 자신만만했다. 아직 둘레길을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경험까지는 못했어도,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뿌듯함’은 느껴보았다. 오늘 걸음에는 새 학기를 맞이하기 전 생각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서울 둘레길 7코스가 모두 처음이었다. 오늘 코스를 책임질 모임 장도 초행길이어서 우리는 모두 지도를 보면서 함께 길을 잘 찾아가야 하는 미션이 추가되었다. 역 근처에서 김밥과 생수를 사서 가양대교를 걸었다. 가양대교를 걷는 길은 차들이 쌩쌩 달리고, 인도도 좁아 걷기가 영 불편하고 위험했다. 가본 적은 없어도 TV로 접한 뉴욕의 브루클린 브릿지 다리의 인도가 한없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가양대교를 지나 난지천공원에 이르렀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온 우리는 난지한강공원 벤치에 앉아 김밥과 각자 집에서 싸 온 과일을 먹었다. 아직 쌀쌀한 기운에 사람들이 거의 없는 오전 난지천공원은 학교에서의 분주함과 부산함과는 대조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한가한 풍경에 푹 빠진 우리는 식사와 과일을 다 먹었는데도 서로의 근황을 나누면서 1시간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완주 후 오후 5시에 합류하는 사람들과 다른 지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지천공원을 벗어나 하늘공원을 향해 가야 했다. 그런데 난지천공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맸다. 같은 곳을 맴돌면서 난지천공원 굴레에 빠진 우리는 난지안내센터를 찾아가서야 겨우 난지천공원을 벗어났다. 우리는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을 지나 문화비축기지에 이르렀다. 식사와 헤매느라 시간에 쫓긴 우리는 노을공원도, 하늘공원의 경치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부리나케 걷기 바빴다. 그런데 ‘문화비축기지’란 곳은 너무 생소해 이곳을 잠시나마 구경하기로 했다.
문화비축기지란 본래 1970년대 세워져 비밀리에 관리되던 기지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으며 2000년까지 석유를 비밀리에 비축하던 옛 마포석유기지 전신이다. 2002 한일월드컵 유치가 결정되고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신축이 확정되자 2000년에 폐쇄되어 유휴지로 있다 ‘시민아이디어공모전’을 통해 2017년 9월에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하여 개관한 곳이란다. 총 6개의 탱크 원형이 있는데 우리는 T1. 파빌리온(Glass Pavilion)[석유비축기지 시절 휘발유를 보관했던 탱크]만 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월드컵경기장을 지나 불광천길에 접어들었다. 불광천 길을 걷다 서울 둘레길 구파발역 방향 봉산-앵봉산으로 올랐다. 지금까지 길이 평지였다면 지금부터 8.4㎞는 대부분 산길이었다. 우리는 초반에 시간 관리를 너무 못하여 봉산 전망대에서 제대로 경치를 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구파발역으로 향했다. 봉산도 앵봉산도 계단의 연속이었다. 가뜩이나 힘든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계속 오르내리니 다리가 내 마음과는 다르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시간에 쫓기기도 했고, 몸도 지쳐서 봉산-앵봉산 코스에서 우리는 묵언 수행하듯이 걸었다. 나는 서울 둘레길 정도는 자신만만해하면서 무시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했다. 해파랑길을 생각보다 너무 잘 걸었던 자신에 대한 오만함으로 이번 서울 둘레길은 거리가 더 짧았는데도 몇 배는 더 힘들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구파발에 겨우 이르렀다. 붕어빵을 먹고 나니 힘이 조금은 나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한 대화역에 가니 5시 약속이 30분이나 지났다. 학교 일로 함께하지 못한 선생님들이 합류해서 뒤풀이를 했다. 16.5㎞를 걷고 마시는 맥주는 세상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걷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제주 흑돼지 오겹살을 야무지게 먹었다. 고기야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산행 후 먹는 고기 맛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이가 비슷한 우리는 2023년 서로 하고 싶은 일을 공유했다. 혼자 전국 곳곳의 둘레길을 많이 걸었던 선생님은 5년 동안 걷지 못한 둘레길 걷기를 다시 시작할 거라는 포부를 밝히고, 학교 밖 외부 일을 많이 했던 선생님은 올해는 학교 일에 내실을 다질 계획을 얘기했다. 이번 서울 둘레길 걷기를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획, 실행하기로 했다. 오늘 우리가 범했던 시행착오를 보완하여 가을엔 서울 둘레길 다른 코스로 추진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사람들과 또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혹시라도 지칠 그날에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되리라.
2023년의 설렘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