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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엔 샴페인 Apr 21. 2023

못생김의 부력

 못생김의 부력

 보정과 뽀샵이 난무하고 화장과 조명으로 한 껏 치장한 매무새가 가히 기괴적이다.

천연의 아름다움이란 본데 있는 그대로여야 하거늘, 이제 자연스러움은 투박하고 촌스러우며 칙칙함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잘 나온 사진 한 장 보고싶어 보내 달란 투정이 무색하게 왠 생뚱맞은 제3의 인물을 전송받곤 한다.

 친구끼리 가족끼리도 볼장 다 본 사이, 아니 볼 거 안 볼 거 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라 신선함이 필요해서 였는지, 나도 꾸미면 이정도는 된다 라는 거들먹거림이 마냥 꼴배기 싫지만은 않지만, 자다 부스스하고 꾀죄죄한 모습 그대로의 자연미가 왠지 그리워지곤 한다.

 SNS에 보여지는 사진 한 장에 온 생을 걸 듯이 다리를 늘리고 눈을 키우고 허리는 가늘게 머리는 최대한 작고 또 작게 만들기를 수 차례,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탄생시키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뇌가 비집고 들어가기도 벅찬 머리 사이즈는 자칫 해골보다 작아 오싹함마져 감돌게 하며, 오똑한 콧날로 파리가 미끄럼틀을 타고, 얄상한 턱선으로 과일을 깎을 정도는 되야 어디가서 명함이라도 돌릴 정도엔 든다라는 요상한 법칙이 이젠 당연한 미인상이요, 잘생김의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나처럼 이목구비가 벽에 쓸린 듯 납작납작, 밋밋하고 세상 죄다 긍정적으로 살아갈 만큼의 웃는 상은 그래서 매사가 딱히 불만스럽지 않고, 불평이 있어도 그냥 저냥 살만한 사람은 어찌보면, 가장 만만하고 또한 흔해 빠진 무매력의 소유자로 비춰짐이 가끔은 서운하고 그렇다.

 그냥 서운한 게 아니라 ‘서운하고 그렇다’ 라는 이 ‘그렇다’엔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 서운하면서 슬프다, 또는 서운하면서 애처롭고, 자존감에 균열이 가는 듯한 부서지는 나를 보면 한 참을 추슬러야 다시 원래의 나로 천천히 복귀한다.

 ‘사과같은 내 얼굴 이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 반짝’ 했던 어릴적 나의 순수함은 이미 먹물 흠뻑 머금어 얼룩덜룩 영 말이 아니다. 지금의 거울 속의 나는 ‘눈도 삐뚤 코도 삐뚤 입도 삐뚤 삐뚤’이 되고야 말았다.

 언제나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말썽이라 내가 나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고 부적응자 코스프레로 나에게 갑옷을 입히대곤 했으며,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모든 게 어색하고 영 싫었다. 적당히 이쁨받고 살았지만 더 이상 세상은 살갑지 않았으며, 나날이 보태지는 나이만큼 순수는 커녕 찌들어가는 날 감당하는 데 오히려 숨이 가빴다.

 세상은 그대로였던 거다. 그때도 역시 나는 그닥 이쁘지 않았으며, 이목구비가 자유분방하게 활개를 치고 다녔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매일이 나름 괜찮은 하루처럼 뭣모를 행복감에 이정도면 사는 게 나쁘지 않다고 꽤나 유쾌해 하곤 했다. 철이 없을 때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리는 게 좋은 점은 언제나 나를 위한 성장판은 내가 조절할 수 있단 어설픈 성숙미로 잘 무장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애늙은이’가 동심을 알겠냐만은 나는 그때에도 나름 어린시절을 폭주하며 잘도 즐겨댔다.

 누구의 기준에서 설정된 못생김이든 잘생김이든 그런 건 모르겠을 만큼 늘 내가 색칠하는 갖가지 색감으로 나를 감추고 또 드러내었다. 알맞은 보호색으로 치장하고 산 지가 어언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할 무렵부턴, 패션과 화장법, 머리모양 손질 및 나를 꾸밀수 있는 최대한으로 모든 장치를 동원해 나는 누구보다 멋지게 탈바꿈 할수 있게 되었다.

 띄엄띄엄 게으름이 치고 들어올 때에도 꾸준한 운동으로, 그것이 말도 안되는 가벼운 중량의 깔짝거림이라 할지라도 거르지 않았으며 멈추지 않았다. 보기 좋을 만큼의 적당한 지방ㅡ이것 또한 상당히 주관적이라고 판단됨ㅡ과 약간의 근육으로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다니는 맛이 어찌나 쏠쏠하던지, 폭식과 치팅데이가 지상 최대의 낙인냥, 아니 그렇다! 그렇게 식이조절에 신경쓰며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러 애쓰고 살고 있다. 물론 이젠 CG가 워낙이 발달된 세상이 언제부터 스며들 듯, 이런 작은 노력들을 잔잔히 즈려밟고 있으니, 뚜렷하게 누가봐도 못생김ㅡ이건 안타깝게도 상당히 객관적이라고 판단됨이 유감일 따름이다ㅡ이 역력한 나의 수고가 말그대로 정말 수고스럽도 헤이해지면 안된다는 경고등을 깜빡여댄다.

 원래 아이들이 더 이쁘고 못생기고를 칼같이 알아채며 평가한다. 눈이 반짝이는지, 코가 삐뚤한지까지 볼 것도 없다. 원초적 감각으로 맞서는 것이 성인들을 압도한다. 맛없는 과자를 입에 넣어주면 단박에 뱉어버리거나, 예쁜 유치원 선생님 품엔 끊임없이 아이들의 포옹이 이어진다.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없이 맑고 밝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때가 타고 또 타서 빨아봤자 거기서 거기일 듯 쭈글어진 얼굴과 말린 어깨, 굽은 등에 쳐진 엉덩이, 터져나가는 뱃살은 내가 나를 못알아볼 지경에 이르러서야 반성의 기미를 온몸으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열와 성의를 다해 내가 나를 돌봐왔던 젋은 날의 나의 분투가 눈물겹고 기특하다.

 세월에 물 흐르듯 묻어가거나, 생을 통째로 날로 먹어치울지라도 나는 인공적으로 꾸며지는 나는 내가 거부하겠다. 나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느니, 나 다운 모습으로 외로움을 자처하겠다. 지극히 주관적인 미의 기준으로 사람에게 몰개성을 유발하는 시대적 연대의식은 곧죽어도 싫다.

 못생겼을지라도 기죽을 일 하나 없다. 내 할 일 잘 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만 잘 지켜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인성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나의 못생김으로 인해 더더욱 빛이 나도록 속 깊게 갈고 닦아야겠다. 나를 연마하는 일은 어쩌면 귀찮고, 가장 미루고 싶은 일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만 더 나으면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게 다져지는 길 또한 그런 내 안에, 밖에 달려있다. 안팎이 이쁘고 곱고 싶다. 그뿐이다. 그럼 세상 사는 게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처럼 다시 또 좋아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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