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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엔 샴페인 Oct 20. 2023

입춘

 기름 적당히 먹여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닦고 닦아도 낡은 주름은 새삼스럽게도 처량해 보인다. 표정주름 이라고 박박 우겨봐야 초라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보다 앞서,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나를 질질 끌고 가는 중이다. 

 나도 예외 없이, 세월 앞에 장사 없이 두 무릎 시리도록 마르고 닳는 중이다. 갈수록 노곤해지는 영혼의 추임새는 어느새 신명을 잃어 하루가 종일토록 지루하며 밍기적 거림의 연속이다. 이불 속을 탈출하기가 이리도 힘겨운 걸 보면 아직도 정신무장과 육체보강의 길은 멀고도 험함이어라. 

 쑤셔넣은 억지가 자세를 잃고 그새 쌓인 온 몸의 지방 사이를 겹겹이 뚫고 나오는 걸 보면, 나는 올 겨울도 죄책감 하나없이 두꺼운 외투 속에 꽁꽁 나를 잠가놓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홀대하고 방치하는 순간 고대로 내가 나를 증명해 내고야 만다. 탄로나는 것 역시 숨 한 번 힘껏 들이 쉬는 일 보다 쉬웠음이 나는 어제도 오늘도 계절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를 그 찰나의 속력에 두손 두발 들어 벌을 서고 있다. 

 날씨가 우중충하다 못해 머리채를 질질 끌고 바닥을 또 천장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듯 별로인 기분을 과감히 뒤로하고 차오르는 봄의 스텝을 허겁지겁 맞이하는 나의 준비성 또한 칠칠치 못하다. 적어도 ‘계절감각 만이라도 준수하고 살아라’ 하는 마음의 소리가 한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겨울의 차림새를 혼쭐내는 중이다.

 푸르딩딩한 가슴팍의 멍이 적어도 한 계절을 모조리 뒤덮고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몽고반점의 사라진 행방 만큼이나 세상엔 내가 알 수 없는 것 들이 모조리 시간 속에 촘촘히 들이차있다.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모를 맹목성으로 나는 견뎌야만 했다. 

 이유도 맥락도 없이, 깜빡이도 키고 들어오지 않은 불행과 고통의 통증이 심신을 들볶아 대던 지난 겨울의 아픔은 이제 뒤로하고, 이젠 다가오는 봄을 당당히 맞이해도 좋을 것만 같다.   오늘은 왠일로 볕이 유난을 떨어대는 통에, 날이 온통 따뜻하기만 하다. 이건 도무지 격파될 것 같지 않은 기왓장의 무장처럼, 한겨울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 붙어있던 내가, 나를 구석 구석 꼼꼼히 들여다봐도 어디 하나 무리없이 만큼, 이젠 괜찮다. 조금 많이 괜찮아질 욕심을 부려봐도 좋을 만큼 이 계절은 그저 축복이다. 

 땅굴 파고 숨어들었던 나, 이젠 한결 포근해진 나는 도파민의 분수 속으로 알몸 드러내며 힘차게 뛰어들고 있음을 각성하는 순간, 성급해진 나를 불러세우며 찬찬히 하늘을 보게 한다.    땅을 밟게 한다. 나는 비로소 또 한 번의 생을 얻어 어둠을 응시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

 올 봄은 꼭 꽃구경을 하러 갈테다. 기필코 흩날리는 벚꽃의 충동에 함께 자지러져 볼 테다. 바람결에 그렇게 나를 한가로이 놓아둘 테다. 저항없이 무조건 평화로울 테다. 

 나는 지금 여전히 살아있다. 지나간 계절만큼, 그 날수 만큼, 치침의 수만큼 힘껏 늙어버렸지만, 개의치 않을 테다. 눈가가 자글거리도록 신나게 웃어제낄 테다. 그래도 충분히 좋을 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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