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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용 Dec 29. 2022

낙서로 만나는 나

                                                         

 고등학생 때 교실이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고 나는 자리에 앉아 낙서를 한다. 모나미 볼펜으로 먼저 직육면체 테두리를 그린다. 삐뚠 선을 만회하려고 덧그리다 보면 직선과 사선이 가득 채워지고 시커먼 한 덩어리가 된다. 크고 작은 직육면체들이 모이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너, 나한테 왜 그러니? ’ ‘난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렇게 살려면 도대체 왜 태어난 걸까?’ 대답 없는 책망과 한숨에 꾹꾹 볼펜을 눌러 선을 긋다 보면 종이가 뚫린다. 내 살갗이 뜯기는 것 같아 눈물이 번진다.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직육면체 위에 검은 눈물 한 방울이 동그랗게 번져나가는 순간은 선명하다. 

 요즘도 훅 치고 들어오는 감정이나 생각을 붙잡고 내 안의 나와 주고받으며 대화한다. 갑자기 왜 눈물이 난 거니? 그렇게 화낼 일이었니? 꼬치꼬치 캐묻고 숨길 필요 없는 진짜 대답을 하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랬구나~ 아직도 과거의 상처가 나를 헤집는구나~ 토닥토닥 양팔로 어깨를 두드린다.     


 지루한 대학 시절의 생물수업 시간이다. 늘 봤던 가로수가 플라타너스라는 멋진 이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정을 둘러보고 강의실에 앉아 이론 공부를 하던 중이다. 더운 여름 앞에 앉은 여자아이의 옆구리 살이 브래지어로 인해 툭 튀어나온 것이 안쓰럽게 보인다. 교재에 볼펜으로 사람 옆얼굴을 그린다.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은 깊은 호수처럼 움푹하고 찌르듯 날카롭게 솟은 콧대는 만화 속 여주인공이다. 하늘로 치켜 올라간 속눈썹은 얼굴 반을 차지한 큰 눈을 더욱 이국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얼굴을 그린 후, 이마 윗부분부터 굽이치듯 볼륨감 넘치는 웨이브 머릿결은 어깨를 지나 등판을 덮고 한껏 치렁거린다. 지극히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그런 여자가 탄생한다.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나는 예뻤으면 좋겠다. 책상 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큰 거울을 올려놓고 수시로 쳐다본다. 옆 얼굴을 보고, 정면으로도 보고, 줌 인하여 꼼꼼히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반짝거리고 또 어떤 날은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버린 여인의 모습이 있다. ‘머리를 안 감아서?,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잠을 설쳐서?’ 진지하게 이유를 찾고 어제의 나를 반성한다. 80살이 되면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를 중간 정도의 커트로 정돈하고(물론, 머릿결은 좋아야 한다. 염색을 하지 않으니 가능할거야) 허리 라인이 드러나게 아랫도리에 집어넣은 분홍색 블라우스와 아이보리 바지나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굽 낮은 플랫슈즈로 사뿐히 다니고 싶다. 무심코 그렸던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은 아니더라고 정갈하고 소담한 모습으로 나이 들겠다.     


 주변에 회색, 검정색, 남색 잡동사니 잔뜩이던 시절에도 분홍 색연필을 쥘 때가 있다. 하트를 그리고 웃음 꺽쇠를 남발하는 낙서에 필요하다. 엉망진창인 현실에서 더 이상 뭘 해 볼 힘도 없이 멍한 표정으로 잡아드는 게 분홍 색연필이다. 가끔은 ‘ 내 방’을 그리며 가구를 배치하고, 내가 결혼을 하고 낳을 아기들 이름을 지어보기도 한다. 오늘은 이렇게 착잡하고 암흑 같아도 나의 내일은 분홍이어야 한다는 지독한 바램의 표시다. 

지금 나는 또 분홍색 색연필을 든다. 퇴직 후 열게 될 센터의 이름을 지어보고, 그 곳에 들일 깔끔하고 지적인 소파와 의자를 디자인한다. 수평선이 보이는 휴양지 선베드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는 장면보다 내가 만날 아이들과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할 지가 더 궁금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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