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습득의 생득주의적 입장을 지지한다. 대표적 학자인 촘스키는 아동은 태어날 때부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생득적인 능력에 의해 언어를 습득하게 되며, 환경에서의 경험은 이미 내재화되어 있는 생득적 언어능력을 촉매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작년부터 전문적학습공동체 선생님들(8명)과 글쓰기 워크숍을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다. 글쓰기 강연을 하는 작가를 섭외하여 회기마다 주어지는 주제로 글을 쓰고 서로 피드백하는 과정이다. 한 번에 3회 정도 진행되는 연수라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과제를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하는 동료들이 공감되지 않았다. 나는 일주일간 글감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찾아가는 그 여정이 신비하고 설레었다. 좋은 글을 쓰려는 욕심을 버리고 좀 더 솔직하게 나를 알아가는 도구로 작용하기를 바랬다. 여기서 주목하는 성찰적 요소는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글은 언어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어 즉, 말(혼잣말이나 편한 상대와 나누는 수다를 제외한)에 대한 부담이나 두려움이 내가 속한 조직의 구성원(비교 가능한 대상이 이들이다)보다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교실에서 학생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시시비비를 가리며 교사로서 교훈적이면서 마음을 적시는 감동적 멘트를 날려야 할 바로 그 때 나도 모르게 줄줄 방언이 터지듯 주옥(?)같은 언어가 나온다.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지 않으면서 충분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진심의 사과를 하며, 선언같은 믿을만한 다짐을 하게 만든다(내가 기억하는 나는 최근 몇 개월 동안의 모습이다. 예전의 나를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해마다 교사로서 일과처럼 진행되는 동료교사학부모 대상 공개수업을 대하는 자세도 그렇다. 누군가의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전 세대를 걸쳐 굉장한 부담을 느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긴장을 즐기며 나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 면도 있다. 이 부분은 초긍정 마인드와 요즘 더욱 높아지는 자아존중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하여튼 누군가의 앞에서 주목을 받으며 말을 하는 것이 남들보다 덜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웅변학원을 다녔고(초2 담임선생님의 권유) 자연스럽게 나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그런데, 나의 부모는 책을 읽어주고 책을 읽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그런 교양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고 집에 오는 택배상자 중 예스24 박스를 언박싱 할 때 가장 흥분하고 좋아하게 된 건 얼마 안 된 일이다. 활자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어도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글짓기상을 자주 받았다는 사실은 타고나기를 언어발달을 관장하는 부분이 기능적으로 잘 구성되었다거나 조직이 조밀하여 발전 가능성이 높았던 것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어의 유창성이나 재치와 순발력은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에 재미없어 덮어버린 책을 다시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아마도 삶에 대한 깊이와 더 확장된 사고의 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레빈슨 이론의 성인기 발달단계 중 지금 나는 성인 중기에 해당한다. 지혜와 판단력이 절정에 달하며 정력적으로 일에 몰두하고, 제자나 후배의 후견인이 되어 주고 그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발달 과업으로 제시한다. 이제는 말을 줄이고 들어주는 것에 집중해야겠다. 진심으로 공감하며 듣는 사람은 어떤 자격증보다 강력한 상담가이자 치료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정한 지혜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언어 발달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듣고 생각함으로써 아름답고 숭고하게 승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