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를 쓴 이기주 작가는 말에도 품격이 있어 ‘말은 마음을 담아내는 마음의 소리’라고 한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고 사람의 귀와 몸으로 다시 스며든다고 한다. 말을 내뱉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두고 한 말일 거다.
얼마 전 모임에서 처음 만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내 시간이 전혀 없어요. 누구 엄마로 살면서 내 이름은 사라지고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며 내 존재가 예전만큼 필요한 것 같지도 않고... 정말 우울해요. 무언가 새로 시작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답답하네요.”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위로가 되는 말이 뭐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세월이 약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큰다’라고 말하면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쩌면 아이들이 독립하는 그 날까지 육아의 고통을 인내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아무 위안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스스로 잘하니까 혼자 여행도 가고 취미생활도 하세요.’ 이런 말을 하려다 삼켜버렸다. 처음 만난 그녀의 경제 사정을 나는 모른다. 혹시라도 경제적으로 힘들다면 여행도 취미도 모두 비용이 드는데 내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을 뿐.
내 맘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나돌봄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의 나도 나를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아이를 출산하고 3개월 만에 복직을 했다. 출산 후 회복이 늦어서 몸이 힘든 상태였지만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마음이 더 힘든 상태였다.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발을 동동 구를 때가 많았다. 밤새 아픈 아이를 돌보다 새벽에 출근 준비를 하는 나에게 ‘힘들지’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가끔 일과 육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며 좋은 직장 다니며 돈벌어서 좋겠다는 사람은 있다. 온기 없이 던진 그 사람의 말은 남은 힘까지 말려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를 떠올리니 그녀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면서 내 생각과 의견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말에도 품격이 있고 온도가 있듯,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할 때 말의 온도와 주변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첫 만남이나 지인과의 모임에서 너무 조용하면 어색하고 불편할까 봐 운을 띄우고 이야기를 주도하는 편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개인 신상이 다 털린 느낌이네’하며 후회한 적도 많다. 나이 들며 오랫동안 쌓였던 감정이 마구 쏟아지는 순간이 있다.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듯 쉴 새 없이 떠드는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두서없이 내뱉은 말속에 상대의 마음을 베어내는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올 때도 있다.
그날 이후 난 상대방의 말의 온도와 마음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며 말보다는 귀 기울여 듣는 입장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능한 한 말로 말미암은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가볍게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자신의 인생이 더 한심하다는 기분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먼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대화를 해야 한다. 툭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듯, 자신의 생각을 툭 던진 한마디로 누군가는 멍이 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끼고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 밭도 돌봐주어야 한다. 마음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오늘 힘들었지?
넌 잘하고 있어.
맛있는 거 사줄게.
오늘 더 젊어 보이세요.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말의 씨앗을 품고 살아가면 좋겠다. 우울하고 답답하다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울고 싶을 때 조금 울어도 괜찮고 사무치게 외로울 때는 누군가에게 잠시 기대도 보고, 힘이 들 때면 조금은 덜 열심히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건지,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도 함께.
수원 행궁동 골목길을 거닐며 찍은 사진
드라마 촬영했던 그곳…
가을 끝자락..코스모스가 어여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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