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불안하다. 뭔가 딱 정해진 이유가 있다거나, 증거가 있는 불안이 아니라 그냥 불안, 그 자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연락을 주고받는다거나, 둘이 만난 걸 봐서 생긴 불안이 아니라, 그냥 ‘이제 날 예전만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그 불안이 날 찾아온다. 말 그대로, 불안이 내게 들어오는 것 같다.
‘오지 말라고, 날 좀 내버려 두라고’ 막아도 항상 내게 들어와서, 언젠가부터는 나는 막으려 하지 않고, 내게 들어온 불안을 더 키운다. 담쟁이 덤불처럼 머리에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달라붙은 불안은 내 사고를 어지럽힌다.
그래. 내가 의심이 심한 거 맞아. 나도 인정해. 그런데 내가 이렇게 된 거에 네 잘못은 정말 아무것도 없어? 넌 날 의심하게 만들었잖아. 그렇다면, 네가 참고 버텨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 정도까지 집착하게 됐을까? 아니, 내 행동이 정말 집착이고 의심인 걸까? 내가 했던 건 당연한 반응 아니야?
네가 그걸 집착이라고 해서, 나도 심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줄였어. 넌 버텨보겠다고 해놓고, 한 달 만에 못 버티겠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집착을 줄였고, 너도 그걸 인정했잖아. 그런데도 이게 내 잘못이라고?
우리가 싸우다가 말이 안 통해서 커플 상담을 받기로 한 건데, 왜 내가 ‘집착이 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 상담을 받아야 해?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아니야. 나도 알아. 내가 의심 많고 집착이 심한 건 스스로도 느끼고 있어. 굳이 너랑 계속 만나는 게 아니더라도, 내가 이 상태인 이상 다음 연애도 똑같이 힘들 거야.
그래서 상담을 받으려고 하는 거잖아. 근데... 억울하잖아.
처음부터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다음 연애 상대가 너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굳이 의심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서아는 글을 쓰다 말고 지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솔직하게 쓰면 상담사가 나만 문제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솔직한 게 도움이 될까? 아니, 분명 그 사람은 자기가 억울했던 것만 적을 거다. 그럼 나는 그냥 ‘문제 있는 여자친구’처럼 보이겠지.
상담사도 그걸 똑바로 알아줄 수 있을까?
일단… 적어보자. 사실대로. 그리고 나중에 뺄 거 빼고, 더할 거 더하자.
저는 원래 의심이 많은 편이에요.
중학교 때 첫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웠어요.
그 일이 그냥,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100% 믿는 게 무서워졌던 게.
지금 남자친구한텐,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안 했어요.
처음엔 저도… 진짜 믿고 싶었어요.
그래서 말했죠.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이라 여사친이 많거나 자주 연락하면 못 만날 것 같아.”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랬어요.
“난 여사친 단 한 명도 없어.”
그래서 저도 그냥 믿었어요.
폰도 안 봤고요.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연락 온 여자 없어~?” 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정도였어요.
진짜로 의심한 건 아니었어요.
근데 100일쯤 됐을 때, 찜질방에서 같이 남자친구 폰으로 유튜브를 보는데
갑자기 여자한테서 문자가 왔어요.
그 순간… 그냥, 딱 알았어요.
‘아, 아니구나.’
그래서 말했죠. “들어가서 봐.”
근데 그 사람이 폰을 뒤로 숨기면서 이러는 거예요.
“나 믿어?”
솔직히 너무 웃겼어요.
믿고 안 믿고 가 문제가 아니라, 난 지금 눈으로 봤는데.
그래서 결국 제가 폰을 직접 봤어요.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었어요.
사귀기 전부터 연락하던 사람도 있었고,
기차에서 마주쳤다, 깨워달라, 너만 믿는다…
이런 말들.
그때부터였어요.
제가 다시 집착하게 된 건.
그전까지는 진짜 의심 안 했거든요.
그 사람 말만 믿었어요.
근데, 100일 동안 계속 거짓말을 했던 거잖아요?
사실 이 문제는… 거의 해결된 셈이죠. 제가 하도 지치고 싸우다 보니까, 그냥 포기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지금 상담을 받으려는 건 이 문제가 아니에요.
진짜 문제는, 말이 안 통해요.
남자친구는 자기 방어가 너무 심해요. 자기랑 다른 의견을 말하면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여요. 그냥 듣질 않아요. 저는 설명을 해요. “이래서 이런 거야. 네 말보단 이 말이 더 맞는 것 같아.” 그렇게 얘기하면, “왜 나를 설득하려 해? 난 내 생각이 그래.” 이래요.
근데 모든 게 상대적인 건 아니잖아요. 어떤 건 그냥 정답이 있는 문제잖아요. 예를 들어 수학문제 답 틀려놓고 “내 의견은 이거야, 왜 존중 안 해?”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나요?
근거도 없이 자기가 맞다고 우기고, 제가 왜 그게 아닌지 설명하면 듣지도 않고, 오히려 “왜 나한테 이래? 왜 날 무시해?” 이런 식이에요.
아예 물어보질 말든가. 왜 물어보고선 듣지도 않고, 내가 말하면 다 공격이라 생각해요?
이런 대화 방식 때문에요, 솔직히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하나의 예시를 들어볼게요. 실제로 나눈 대화예요. 남자친구가 말했어요. “밤에 여자 혼자 길을 걷다가 뒤에 남자가 있으면 계속 뒤돌아보잖아. 그거 진짜 기분 나쁘지 않아? 그게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는 거잖아. 남자 혐오 아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뭘 더 말해야 하나 싶었어요. 당황스러웠지만 설명했죠. “그건 그 남자 개인이 아니라, 그 상황의 위험성을 무서워하는 거야. 대낮에 버스정류장에서 그 남자를 봤다고 무서워하진 않잖아. 그게 어떻게 남혐이야?”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몰라. 난 그냥 남혐 같아.”
끝이에요. 이유도, 근거도 없어요.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도, 어떤 부분이 불쾌했냐고 물어도 “그냥 그런 것 같아. 왜 내 감정은 존중 안 해?” 이 말만 반복해요.
저는 존중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단지, 감정은 존중하더라도 잘못된 생각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 사람은 감정과 생각을 구분하지 않아요. 자기 생각에 이견을 내면, 그건 곧 자기를 공격하는 거래요.
매번 이런 식인데 말이 통할 리가 있나요?
제가 연락 문제로 서운함을 느껴서 말을 하면, 저는 늘 생각해요. 상대가 서운하다고 말하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은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 아닌가요?
예를 들어, 제가 “네가 게임할 때 연락이 안 돼서 좀 화가 나. 나보다 친구랑 게임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 속상해”라고 말하면, 남자친구는 꼭 “근데 너도…”로 시작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너도 화나는 건 이해해. 근데 내가 먼저 속상하다고 말했으면, 일단 그 감정에 공감해 주고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랬더니 남자친구는 “미안하지도 않은데 왜 사과를 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 말했어요. “미안하지 않아도 일단 사과를 하고, 그다음에 너도 속상했던 얘기를 하면 되잖아. 어쨌든 나는 너 행동 때문에 속상했고, 그걸 말했으면 네가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해서 ‘미안해’라고 말해줘야 우리가 그다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거 아냐?”
그랬더니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겠대요. 진짜 웃기죠?
그래서 결국 싸움은 끝도 없이 길어지다가, 매번 제가 먼저 “그래, 너는 내 이런저런 행동 때문에 화가 났구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하면 그제야 “나도 미안해”라고 말해요.
진짜로, 싸움이 항상 이 패턴이에요. 너무 짜증 나고, 이젠 지쳐요.
서아는 노트북을 닫았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왜 나는… 왜 나는 그냥 평범하게 연애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만난 사람들만 이상한 거야? 아니면… 진짜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내가 이런 걸로 상담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인가…
갑자기 현실적인 생각이 밀려들었다. “상담비… 왜 이렇게 비싼 거야. 한 사람당 12만 원이라니….”
곧 취업이니까. 이 정도는 나한테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그래, 투자야. 어떻게든 좀 나아지려고 하는 거니까
서아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쓰다 지운 글, 감정 섞인 방어적인 말투. 그걸 다 다시 쓸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지금 상태로 상담을 받으면 또 괜히 오해만 받을 것 같았다. 몇 번을 고쳐봤지만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았다.
서아는 또다시 노트북을 닫았다. 이번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이제 정말 아무 말도 쓰기 싫었다.
‘상담받겠다고 마음먹은 게 뭐라고 이렇게 힘이 들지…’
그녀는 무릎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남자친구에게 보낸 카톡은 여전히 회신이 없었다. 답이 안 오는 건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 거라고, 지금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머릿속으론 몇 번이고 되뇌어 봤지만 눈길은 자꾸 대기 중인 그 말풍선에 가 닿았다.
그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답장을 안 할 정도로 바쁜 걸까. 아니면 그냥… 읽었는데, 무시하고 있는 걸까. 뭐가 됐든,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일도 아침 일찍 도서관 가야 하니까, 휴대폰 조금만 보다 자야지…” 혼잣말을 중얼이며 인스타를 켰다. 텅 빈 DM 함과 멀뚱한 피드가 눈에 들어왔다.
외로웠다. 친구들은 다 남사친도 많고, 단톡방에서 웃긴 짤 올리며 시시콜콜한 얘기도 나누던데, 나는, 그냥. 이렇게 조용히, 혼자.
'나도 남사친들이 많았으면 집착하거나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걸 받는 쪽이었을까?'
누가 나한테 집착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비뚤어진 욕망인 건 알아도, 적어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들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다들 도대체 남자는 어디서 만나는 거야?' 서아는 손에 힘을 살짝 주며 인스타 피드를 넘겼다. 학교에서, 알바에서, 동아리에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만나고 연애하고, 이별도 하던데.
나는 학교 같은 반 아니면 연애해 본 적도 없고, 친구 자체도 많지 않다. 소수의 사람들과 소극적인 관계. 그래서 더더욱, 한 인연에 기대 버리는 걸까.
'나만 이렇게 사는 걸까… 이건, 이미 놓아야 할 인연인데 놓지 못하고 계속 매달리고 있는 걸까.'
답장 없는 채팅창을 계속 들여다보다가, 또다시 홈버튼을 눌렀다. 인스타, 카톡, 다시 인스타. 누굴 찾아서 보려는 것도 아닌데 그저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너무 외롭다…'
그렇게 오지 않는 잠을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오게 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도서관으로 가는 길, 햇빛이 은근히 따뜻했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도 ‘왜 아직 연락이 없을까’ 하며 마음이 바짝 마르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답답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상담 전까지는 연락 안 하기로 했잖아.’ 그걸 떠올리자, 마음이 아주 조금, 숨 쉴 틈을 찾은 것 같았다.
이게 그저 체념에서 오는 평온인지, 아니면 진짜 조금 나아지고 있는 건지 서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괜찮았다.
… 내일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