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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밤 집착증

누구나 하나씩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다면

by 다인

‘이 근처 화장품 가게가 어디 있지?’


재작년 글쓰기 모임에 가기 전에 나는 다급하게 화장품 가게를 검색해야만 했다. 퇴근하고 급하게 오는 바람에 화장품 파우치를 회사 사무실에 두고 와서 ‘립밤’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이 날은 공식적으로 회원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라 나에겐 ‘립밤’이 절실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긴장감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응급처치 도구라도 없으면 그 자리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약속 장소 근처에 화장품 가게가 있어 연한 분홍빛 립밤을 살 수 있었다. 립밤 덕분이었을까. 무리 없이 첫 모임에서 당당히 나를 소개할 수 있었다.


그때 했던 글쓰기 모임에서 썼던 원고가 잘되어 출판사와 계약이 성사되는 쾌거를 맛보았다. 연애 실용 서적인데 그 덕에 난생처음 연애 강연할 기회도 주어졌다. 비대면 라이브 강의여서 영상을 찍기로 한 날, 나는 머리와 화장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 촬영 직전에 청심환을 챙겨 먹는 마음으로 수없이 립밤을 발라댔다. 나의 실제 연애담을 강연으로 풀어내야 하는 압박감은 어마어마했다. 산 지 얼마 안 된 립밤이었는데 그날 사용한 립밤의 크기는 강연을 처음 하는 나의 긴장감 크기에 비례했다. 거의 절반이 통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립밤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중학교 때는 화장품의 ‘화’ 자도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남녀공학 학교에 다니니 왠지 모르게 립밤에 자꾸 손이 갔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기 전 붉은 챕스틱을 입술에 덕지덕지 발랐다. 혹여나 옆 반 남자 친구들을 복도에서 마주칠지도 몰라 바짝바짝 마르는 나의 입술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 생기 넘치는 입술로 말을 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성의 눈을 뜸과 동시에 나의 립밤 사랑은 시작되었다.


성인이 되니 나의 립밤 사랑은 집착에 가까워졌다. 평소 나는 카페보다 술집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 술집에서 자리에 앉기 전 외투를 벗고 가방에서 꺼내는 건 핸드폰이 아니라 립밤이다. 짓궂은 남사친들은 그것을 라이터로 착각해 “아직도 담배 피우냐? 좀 끊으라고~” 말하며 장난을 치곤했다. 내게 술을 마실 때는 립밤은 절대적으로 필수품이다. 안주는 없어도 립밤은 꼭 있어야 한다. 립밤으로 만든 촉촉한 내 입술의 생기는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안주와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입술 마르는 걸 극도로 불편하게 여겨 미리 테이블에 올려놓은 립밤을 수시로 발라준다. 그렇다고 한 잔 마실 때마다 바르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건 립밤보다 소주니까 말이다. 간혹 술자리에서 대화가 끊겨 친구들이 핸드폰을 볼 때가 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립밤을 바르며 상대의 볼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굳이 나는 연락 없는 핸드폰으로 SNS나 뉴스를 보지 않고 핸드폰 액정으로 미러링 되는 내 입술을 보며 립밤을 바른다.


나의 립밤 집착은 집에서도 멈출 수가 없다. 결혼 4년 차인 우리 부부는 집에서 반주를 즐겨한다. 식탁에 잔과 술, 안주를 세팅한다. 그리고 남편 자리와 다르게 내 자리에 하나 더 추가되는 건 역시 립밤이다.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에 연하게 발색되는 립밤을 바르면 순식간에 옅은 화장을 한 것 같은 얼굴로 변신시켜 준다. 정성스레 화장하지 않아도 아주 조금의 노력으로 남편에게 예뻐 보일 수 있으니 안 바를 수가 있나. 그리고 먹으면서도 립밤이 입술에서 없어졌다고 느끼면 늘 그렇듯이 립밤을 발라 준다.


그렇다면 혼자 있을 때는 립밤이 필요 없지 않을까? 실은 혼자 있을 때 가장 많이 립밤을 찾는다. 나는 생각에 잠길 때 입술을 뜯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뇌 속에 잡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손은 입술을 향하고 있다. 특히 윗입술과 아랫입술 중 껄끄러운 각질이 부각되면 그 부분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손으로 다듬는 과정을 거친다.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고 생각이 들면 립밤을 발라 마무리한다. 어렸을 때는 입술을 계속 뜯어 피를 많이 보긴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면 입술이 건강상으로나 미관상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심하게 뜯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어온 습관을 단번에 고치기란 어렵다. 요새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집에서 혼자 있을 때 립밤을 잔뜩 바른 상태에서 마스크를 끼고 있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가 생활화되니 마스크를 끼고 있을 때는 입술을 뜯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덕분에 30년 넘게 못 고친 입술 뜯는 버릇을 고칠 수 있는 혜안을 발견하다니,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보통 입술 뜯는 버릇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불안감을 표시하는 행동이라고들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긴장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가족과 절친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면 뭔지 모를 긴장감에 손발부터 차가워진다. 긴장되는 상황에서 입술을 뜯지 못해 립밤을 발라 입술을 부드럽게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같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랄까.

마음속 긴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나의 긴장을 풀어주는 립밤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수시로 립밤을 바르면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 지에 관한 생각에 나를 긴장과 압박감에 놓이게 한다. 오늘도 립밤으로 그 마음을 달래 본다. 고마워요, 립밤.



* 해당 글은 월간 웹진 2W매거진 22호 '반려에 대하여'에 수록되었습니다. 2W매거진은 only ebook으로만 발행되며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리디북스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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