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과 내리막 사이에서
“자기야 오늘은 밖에서 보내고 싶어”
“어디 가고 싶은데?”
“음.. 심학산?”
“등산하자고?”
주말 아침,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이 밀려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기말고사 시즌이라 과제가 밀려 서재에 앉아 집중하려고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걸 알면, 그냥 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만 올라왔다.
제때 해소시켜 주지 않으면 불안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미리 해야 한다’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를 보채고 있었다. 빨리 끝내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데(전공도 하고 싶은 공부에 해당되지만 과제는 그렇지 못하기에..) 그 조급함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하루빨리 대학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고..
제출 기한을 확인해 보니 가장 빨리 끝내야 하는 과제 마감일이 일주일 뒤였다. 마무리만 하면 되었기에 시간이 남는다는 걸 ‘뇌’도 인지하고 있는 건지 집중이 더 안 됐다. 결국 책상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안방에 있는 ‘안방 남자’에게 향한 것이다.
방문을 열고 보니 남편은 침대 헤드에 쿠션을 대고 TV로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등산을 가자는 말이 튀어나왔다. 산에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인데, 그 1년의 한 번의 날이 온 것이다. 심지어 산의 이름도 명. 확. 하. 게 말했다. 심학산은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이고, 2년 전에 한 번 갔던 산이었다. 가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낮은 산이라 그때도 무리 없이 다녀온 기억이 있었다. 왜 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핸드폰에 산에 가서 찍은 사진이 있어 기록된 날짜를 보니 납득이 가는 일진이었다(필자의 직업은 역학인이다).
내 표정을 본 남편은 바로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주말 아침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쉬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그날은 내 뜻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였는지 별다른 소리가 없었다. 그이가 씻는 동안 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보리차를 보온병에 담아 나갈 채비를 마쳤다.
도로가 한산해 10분 만에 산의 공영 주차장에 도착했다. 2년 만에 왔지만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산 초입은 숲길과 돌길로 두 방향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2년 전 돌길이 운치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서 고민 없이 그 길을 택했다. 첫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은 촉촉했고 습기 먹은 숲내음이 코로 느껴졌다.
빠르게 정상을 오르기보다 둘레길로 천천히 오르기로 했다. 그저 산을 한 바퀴 돌며 답답한 머릿속을 산의 정기로 흘러 보내고 싶었다. 오르면서 이 답답함과 불안의 정체는 뭘까 고민했지만, 앞만 보고 오르다 보니 잡생각이 하나둘 사라졌다. 어느새 몸도 후끈해져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허리에 둘러 묶었다. 둘레길은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언덕으로 반복됐다. 오르막길이 힘들 때면 곧장 내리막길로 이어졌고, 내리막을 내려오면 또 오르막이 나왔다. 내 감정의 오르막 내리막을 발로 눌러 걷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마음이 평온으로 가는 길로 가는 것 같았다.
고도 192m의 낮은 산이어도 마의 구간은 있었다, 넝마가 뒤덮인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어느 정도 올랐을 때 ‘이쯤 되면 거의 다 왔겠지’ 하면서도 위를 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손을 잡아 이끌어주었지만 그이와 발폭이 맞지 않아 그냥 먼저 가라고 했다. 나는 내 속도대로 천천히 올랐다.
어느새 정상에 닿았다. 막상 정상에 오르니 살짝 아쉬움도 있었다. 그새 힘든 걸 잊었는지 더 오를 수 있겠단 마음이 드는 게 간사했다. 이 정도면 올챙이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 하는 수준 아닌가. 날이 흐려 전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 덕분에 머리도, 마음도 시원해졌다. 땀이 추위로 바뀌는 무렵 올랐던 길 그대로 내려가기로 했다.
오를 땐 힘들었지만, 내려갈 땐 두려움이 생겼다. 땅이 젖어 미끄러지지 않게 다리에 힘을 주고 내려가야 했다. 경사가 있는 곳은 남편의 팔에 매달리듯 내려갔다. 그 안정감이 좋아 내리막이 나오면 자연스레 남편의 팔을 잡게 됐다. 오를 때는 내 속도대로 가겠다며 손을 거부하더니, 내려갈 때는 남편의 팔을 찾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웃겼다. 그런 얘기를 도란도란하며 내려오다 보니 아침에 느꼈던 불안은 사라지고 웃음과 평온만이 남았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과는 다르게 과제를 수행할 마음의 힘이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산을 다녀온 나만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과제를 해야 할 시간이 줄었음에도 마음은 훨씬 편안했다.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답답하고 불안해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던 걸까. 모든 나쁜 기운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상황은 변치 않았는데 내 마음만 변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안의 원천은 좋지 않은 상황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걸까. 그 순간 부처의 말씀 중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통도, 평온도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전부 내가 지어낸다는 것이다. 뭐든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날 처음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는 답답해지기 전에 마음 관리를 평소부터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가오는 내년엔 새로운 취미가 하나 더 생길 것 같다.
(등산을 마치고 수육을 포장해서 먹었는데 이 때문에 불안도.. 기력도 좋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