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란 역시 어려워
여행 짐 싸다 벌어진 일
남편과 나는 둘 다 역마살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여기저기 즉흥 여행을 좋아한다.
(실제로 그럴지도?)
오늘도 잠잠하던 그 역마 기운이 발동했다. (오늘의 기준 : 22.01.18)
지난 11월 강릉 시골살이 후 한 달 넘게 어딜 가지 않았으니 충분히 근질근질했으리라.
답답하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마음이 오늘 통했다.
다행히 이번 주는 별다른 일정이 없어
지금, 오늘, 바로 떠나기로 했다.
여행지는 제주도로 정했다.
예전부터 제주 올레길을 걷고 싶었다.
그동안은 관광 목적에서만 제주도를 찾았다면,
이번에는 내 발로 제주도를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나는 내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는 걷기 여행을 좋아한다.
걸으면서는 아름다운 경치도 보고 잡념을 잊는다.
운동이 되는 건 덤이다.
남편과 연애 초반이었던 7년 전,
둘 다 가방 하나씩 메고 제주 버스 투어를 했다.
힘들게 버스를 타고 도보를 걸으며 한 여행이라 그런지 그때 추억이 생생하다.
이번에도 그 기억을 되살리며 온전히 제주를 느끼기로 했다.
일정은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6일로 잡았다.
정했으니 실행으로 옮겨야지.
남편은 비행기 티켓과 묵을 호텔을 알아보고, 나는 가져갈 물건을 챙겼다.
걷기 여행이라 짐을 간소하게 챙겨야 하는 게 나의 주요 미션이다.
겉옷 패딩과 집업은 어차피 몸에 걸칠 거니까 패스.
트레이닝 바지도 하나로 6일을 입을 거라 패스.
안에 입을 반팔 티 4장, 속옷, 양말, 장갑,
영양제, 세면도구, 화장품, 노트북, 태블릿, 충전기,
모자, 이어폰, 다이어리, 필기구, 마스크를 챙겼다.
최소한의 짐으로 가볍게 배낭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챙기고 보니 뭐가 많다.
남편 백팩이 캠핑용이라 노트북과 그의 옷가지, 세면도구, 충전기, 우산을 넣었는데 무지하게 무거웠다.
아무래도 노트북이 한 무게 나가는 것 같다. (17인치이다)
내 가방엔 옷과 태블릿, 지갑, 필기구, 다이어리 등을 쑤셔 넣었다.
오랜만에 짐을 싸서 그런지 꽉 찬 가방에 설렘도 가득 찼다.
우리는 짐을 다 꾸리고 무게가 어떤지 가방을 한번 둘러멨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억' 소리를 내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왜 이렇게 무겁지?"
"그러게나 말이야, 최소한만 챙겼는데...!"
"우리 걸을 수 있을까?"
걸을 수 있을까의 걱정이 여행의 설렘을 순간 덮쳤다.
우리는 다시 가방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뺄 게 없는데...
'그래 다이어리를 빼자.. 노트북에 쓰면 되지..'
'태블릿은? 아 전자책 읽어야 해. 뺄 수 없어..'
'우산? 비 오면 우산 하나 사자'
그래서 겨우 뺀 게 남편 가방에선 우산, 내 가방에선 다이어리였다.
가방을 던 무게는 크지 않았지만
뺐다는 마음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졌다.
짐을 빼면서 문득 오늘 아침에 봤던 황상열 작가님 글이 생각났다.
인생은 내려놓음으로써 완성된다고 하셨는데
딱 지금의 우리 상황 같았다.
짐을 내려놓지 못해 고생을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내려놓기란 아직은 어려운 일 같다.
어쨌든 이제 막 제주도에 도착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공항에서 걸어 나오며 다시 이 생각이 들었다.
영양제도 뺄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