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이름을 잊은 자들
경성, 1933년 8월 28일.
한일합병 23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밤.
중앙청 주변은 이미 반쯤 봉쇄되어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가림막, 총칼 들고 순찰을 도는 순사들,
그리고 ‘반자이’라는 붉은 글자가 박힌 현수막들.
그 광장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사내가 있었다.
깃을 세운 외투, 말라붙은 입술,
그리고 억누른 분노처럼 식어 있는 눈빛.
김성곤.
조선어학회 출신의 문필가.
지금은 몰래 ‘독립신문’을 인쇄하며 살아가는 조선의 지식인.
“어둡다, 진짜…
언제쯤 이 나라가, 이름을 되찾을까…”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돌렸다.
종로 어귀 좁은 골목, 붉은 등불 하나 간신히 켜진 허름한 일식집.
문을 열자, 종소리와 함께 익숙한 외침이 터졌다.
“이랏샤이마세!!”
주방 너머, 흰 요리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이 번졌다.
정규만.
일식 요리사.
성곤과 한 동네에서 자라난 친구.
“또 광장 갔다 온 거냐?”
성곤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야, 조선 놈이 왜놈 음식 파는 건 참는다 쳐도,
말까지 팔아넘기냐? 그러면 안 된다고 규만!!”
규만이 머리를 긁적이며 국자 손잡이를 꽉 쥔다.
“먹고살자고 그러지. 오늘은 밥이냐, 술이냐?”
“조용히, 술.”
“그럼 국물부터 줄게. 속부터 풀자.”
성곤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문이 다시 열렸다.
찰칵
짧은 구두굽 소리.
먼저 들어선 남자는 감색 순사 제복,
그 뒤엔 검은 정장에 허리엔 일본도를 찬 사내가 따라왔다.
서우덕. 종로서 경보보.
안형준. 일본 귀족가의 전속 호위무사.
그리고 이 둘 역시,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이다.
우덕이 형준을 보며 말했다.
“야야, 내일 카즈야 회장 딸도 오신다며?
칸나였지? 존예라던데?”
형준이 웃었다.
“외모만큼 마음씨도 곱다.
뭐, 칼질 하나 잘해서 귀족가에 붙었으니 망한 나라에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냐.”
“우린 내일부터 죽어난다.
순찰 두 배, 무기창 들락날락.
그래도 경보부 달았으니까, 이번에 경부 딸지도 몰라.”
형준이 잔을 들며 말했다.
“일 터지면 도와줘야겠네?”
우덕이 웃으며 맞받았다.
“이제 와서 뭘 새삼스레~ 친구잖냐.”
두 사람은 웃으며 잔을 맞댔고,
그걸 지켜보던 성곤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야…
니들 그 능력, 독립군으로 갔으면 조선이 반쯤 살아났겠다.”
우덕이 장난스레 말했다.
“어허, 기자 양반 큰일 날 소리~ 나 지금 제국 경찰이다, ”
형준도 잔을 흔들며 말했다.
“독립군 했다가 굶어 죽는 거보다
정장 맞춰주고 전용차 사주는 곳에서 일하는 게 백 배 낫지.”
그때, 규만이 사시미와 스시, 술을 들고 왔다.
“어이, 두 분. 오늘도 사시미냐, 스시냐?”
“스시.”
“난 사시미.”
우덕이 성곤을 보며 술병을 흔든다.
“야, 동경까지 유학 갔다 온 놈이
아직도 미소국만 마시냐?
오늘은 삐루로 가자, 삐루!”
성곤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안주는 그대로, 술맛은 쓰고, 눈빛은 붉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야 할 놈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고 있으니…
아이고… 술 땡긴다…”
그 누구도,
그 말에 쉽게 웃지 못했다.
칼을 든 자, 총을 든 자, 칼날을 다듬는 자, 그리고 펜을 쥔 자.
네 명의 친구가
하나의 술상에 둘러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