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단 눈빛, 게임보단 진심
바른생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형준은 조용히 교과서를 덮고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 끝, 서 있는 정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툭.
어깨를 가볍게 쳤다.
“야, 고맙다. 나 진짜 반성 1도 안 한 거… 너는 다 알잖아.
근데도 편 들어줘서.”
정연은 눈도 안 마주친 채 말했다.
“편든 거 아냐. 그냥… 네가 더 창피한 꼴 안 당했으면 해서 그랬어.”
“… 그럼에도 고맙긴 하다. 찐친은 찐친이지.”
“어휴… 진짜… 됐고.”
정연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갔지만,
그 순간 형준의 눈에는 뭔가 달라 보였다.
그 말투,
그 눈빛,
그 등을 돌리는 타이밍까지.
그동안은 그냥 ‘말 잘하는 친구’였는데…
지금은, 어쩐지.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어? 뭐지?’
형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야… 나 왜 설레냐…”
같은 시각, 규만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 시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수가 조용히 다가왔다.
“규만아…
너는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좋은 친구일 거야.
지금은 잘 안 느껴져도… 나중엔 꼭 알게 될 거야.”
지수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따뜻했지만,
규만의 마음엔 아직 닿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PSP를 손가락으로 굴리고 있었다.
하굣길.
학교 담장 옆, 나무 아래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야, 누가 그러래? 네가 뭔데 참견질이야?”
규만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민지가 있었다.
그녀는 옆 학교 하늘초 남자아이들 다섯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가방은 열려 있었고, 옷깃도 구겨져 있었다.
“누굴 괴롭히든 뭔 상관이야? 그냥 꺼지라고.”
민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럿이서 한 명 괴롭히는 건 아니지.”
“야, 얘 좀 봐? 정의의 사도 납셨네~”
“너도 맞고 싶냐?”
한 녀석이 민지를 밀쳤고,
민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규만의 눈에 민지의 눈빛이 들어왔다.
그날 운동장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
“지키는 거, 아끼는 거… 게임 안 해봤어?”
그 눈빛이었다.
이번엔, 규만이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손에 쥔 PSP 케이스가 떨렸다.
지금 이 안엔 게임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규만이 말했다.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가방을 벗어 툭 내려놓고,
조용히 민지 쪽으로 걸어갔다.
“야, 쟤 뭐냐? 철권 규만 아냐?”
규만은 민지 앞에 섰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민지야… 뒤로 가 있어.”
민지는 당황했지만,
규만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규만은 어깨를 펴고 그들을 향해 섰다.
손에 쥔 PSP 케이스는
이제 더 이상 게임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지키는 마음의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