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부르는 날

한밤의 잔치는 곧 전장의 서막

by 동룡

성곤은 규만의 술집을 빠져나와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기운도, 담배 연기도, 시끄러운 웃음소리도 모두 숨이 막혔다.
그저 탁주병을 붙잡고 연거푸 들이켜며,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람.”
중얼거림은 허공에 흩어졌다.
아무리 기록해도, 아무리 글을 남겨도 세상은 점점 더 잔혹해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서 앞만 보고 듣게.

그대가 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나?
자네가 하는 일은 나보다 더 크네.
현재를 사는 동포에겐 희망을, 미래의 후손에겐 진실을 전하는 일이야.”

성곤은 술잔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울림이었다. 이태한이다.


“그럼 뭐 합니까. 기록하면 뭐 합니까.”
성곤은 웃음도 아닌, 한숨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이럴수록 놈들은 더 악랄해질 뿐이에요. 오늘도 보셨죠?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한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큰 결과는 큰 고통을 동반하네. 과정이 괴로워도, 기록은 불씨가 되고, 그 불씨는 언젠가 역사를 바꿀 불꽃이 되지.”

성곤의 손끝이 떨렸다.
“불씨라...”
그 말이 가슴을 울렸지만, 믿고 싶어도 믿기 어려웠다.

태한은 잠시 성곤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혼자 짊어지기 벅차면 내가 덜어주겠네.
자네는 글로, 나는 칼로. 함께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야.”


성곤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네?”

그러나 골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탁주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성곤은 멍하니 깨진 병조각을 바라보다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겁게 꿈틀대는 걸 느꼈다.
희미했지만, 분명히 살아나는 불씨였다.


형준은 명월관의 화려한 등잔불 아래에서 웃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죄 없는 조선 청년 하나를 고문으로 반쯤 죽여놓고도, 그 얼굴엔 피 한 방울의 죄책감조차 없었다.
손에 쥔 술잔이 그에게는 승리의 증표였다.

옆자리에 앉은 서아가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살짝 웃었다.
“이제 한놈만 남은 거라면서요? 그놈만 잡으면 오빠가 다시 최고의 사무라이로 인정받는 거죠?”

형준은 잔을 비우며 비죽 웃었다.
“그래, 맞아. 그놈만 잡으면 끝이야. 최고의 자리, 명예와 부... 모두 내 손에 들어오지.”

서아는 일부러 천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돈과 실력 모두 갖춘 오빠한테 시집가면, 나도 편하게 먹고사는 건가요?”

형준은 서아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크게 웃었다.
“똑똑하네, 너. 아주 똑똑해.”


그 순간, 명월관의 잔치 분위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짧은 비명, 그리고 쇳소리. 칼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문이 쾅! 하고 터지듯 열리며 형준의 부관 고이즈미가 뛰어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오야붕!! 이태한입니다!!”

순간, 형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술기운은 단숨에 사라지고,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서아를 뒤로 밀쳐내며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그날 밤, 기어이 대결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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