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자와 기록하는 자, 그리고 돌아온 그림자
경성의 하늘은 잿빛이었다.
하늘은 뿌옇고 공기엔 피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더러워서 경찰 못 해 먹겠다.”
우덕은 담배를 짓이기며 내뱉었다.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잡아와도 지랄 놓쳐도 지랄.”
그는 그렇게 경무국을 나왔다.
하지만 입술 끝엔 미묘한 웃음이 맴돌았다.
며칠 뒤, 경성 한복판에 ‘덕흥상회’가 문을 열었다.
비누, 사케, 군수품까지 없는 게 없었다.
우덕은 일본 관리들과 손을 잡고,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 대부분을 ‘국방헌금’이란 이름으로 바쳤다.
“이 나라가 잘 돌아가야 나도 잘 먹고 잘 사는 거야.”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조선의 양심은 조금씩 죽어갔다.
신문사 옥상, 낡은 타자기 옆에서 성곤이 도시를 내려다봤다.
거리엔 일장기가 펄럭이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저놈은 같은 민족을 넘어서 인류 전체에 죄를 짓고 있어...”
그의 말은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종이는 늘었지만, 진실은 매일 찢겨 나갔다.
규만의 술집.
형준이 들어왔다.
여전히 정징을 입고, 칼을 차고 있었다.
“이번엔 어디 숨었지?”
규만은 잔을 닦으며 대답했다.
“두 번째 골목, 기와집 뒤쪽. 내일 새벽에 이동.”
형준은 돈다발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간다.
규만은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이것도 장사야. 누가 기억해? 누가 밥 먹여줘?”
형준이 나가고 가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성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규만, 너 제정신이야? 그거 명백한 친일 행위야!”
규만은 비웃으며 잔을 비웠다.
“독립운동? 글쎄. 그걸로 밥 먹고 살 수 있냐고.
우덕이랑 형준이 봐. 걔넨 잘살잖아.”
성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도 돈에 눈이 멀었냐?”
규만은 피식 웃었다.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독립이야.
너도 거울 봐. 펜으로 세상이 바뀌냐?”
성곤은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세상은 이미 그들의 편이었다.
그때 형준이 다시 들어오며 말한다.
“자! 오늘은 내가 쏜다! 우덕이도 곧 온다!
나!! 장가간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성곤은 고개를 숙였고, 규만은 잔을 내려놓았다.
형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어. 이제는 살아남은 놈이 이기는 거야.”
그 말은 오래된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술집 안은 조용했지만,
밖에선 한 줄기 찬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엔 오래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술집 문이 다시 덜컥 열리고, 우덕이 등장했다.
양복 차림에 기름진 얼굴, 손에는 시가 한 개비가 물려 있었다.
“이야~ 형준이 드디어 결혼하는 거야?
서아가 드레스라는 걸 입어보겠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남자 잘 만나서 아주 기생 팔자가 쫙 폈구먼!”
형준이 잔을 들며 맞받았다.
“하하, 서양식 결혼식이란 걸 내가 해본다고.
이참에 경성도 좀 깜짝 놀라게 만들어야지.”
규만이 잔을 채우며 거들었다.
“역시 돈이 있으니 그런 게 가능하지!
하지만 조심해라, 형준.
이태한… 아직 살아 있어.”
형준은 태연하게 웃었다.
“걱정 마. 경찰부터 군인 경호까지 다 붙는다.
결혼식 당일엔 국방헌금 행사도 같이 해.
이런 날, 나라를 위해 한 번 내줘야지.”
우덕은 큰 소리로 웃었다.
“좋지! 일본 관리들 다 초청해야지!
그게 진짜 성공한 인생이지 뭐!”
술집 안엔 웃음소리가 가득했지만,
그 웃음은 썩은 물 위에 뜬 기름방울처럼 번들거렸다.
성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이놈들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의 목소리는 술잔 사이를 가르며 울렸다.
“결혼은 좋다 이거야!
하지만 서양식 드레스가 뭐야?
그거 다 조선 사람들 피와 눈물로 만든 옷이야!
너희들 정말 그러다 천벌 받아!! 천벌!!!”
형준이 비웃으며 잔을 들었다.
“하하, 이쁜 서아랑 결혼하니까 배 아픈 거냐?”
우덕이 어깨를 으쓱했다.
“독립? 그거 곧 잊힐 거야. 사람은 먹고사는 게 먼저야.”
성곤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깊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잔을 한 번 내려놓고, 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축하한다, 하지만… 정말 나쁘다, 너희들.”
그 말이 끝나자, 술집 안은 순간 조용해졌다.
성곤이 골목을 나서자,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숨이 막히며 벽에 밀렸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그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낮지만 서늘한, 오랜 분노가 서린 목소리.
“저놈이 결혼을 한다고? 서양식으로?”
성곤이 눈을 떴다.
검은 외투를 두른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절대로 안 되지.”
그는 낮게 말했다.
“나 이태한이 있는 한.”
바람이 골목을 스쳤다.
멀리서 희미한 종소리가 울렸다.
그건 축하의 종이 아니라,
심판의 예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