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죽고, 누구는 부자 됐다

전쟁은 모두를 죽이지 않는다 선택된 자를 살린다

by 동룡

성곤은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로
부산역 플랫폼을 비틀거리며 내려섰다.

역 앞은 이미 난민들로 가득했다.
아기를 잃어버린 여인,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들,
그리고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어린아이들.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함께 뒤섞인 곳.

성곤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기록을 시작했다.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 찢겨 싸우는 이 과정과 결과를
후세에 그대로 남겨야 한다.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지, 얼마나 비극인지... 기록하지 않으면 안 돼.”


그의 펜 끝은
폐허 위를 서성이는 영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부산항 쪽에서 형형색색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아메리카 카바레’
‘전속 악단 연주’
‘미군 환영 데이’

신나는 재즈와 스윙 음악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말쑥한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팔짱을 끼고 카바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성곤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이 전쟁통에 춤바람이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나라 지키겠다고 총 들고 싸우는데 저런 구더기 같은 놈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딴 걸 운영하게 놔둔다고?
경찰들은 다 뭐 하는 거야! 저런 건 불 질러버려야지!!
우리 막내 녀석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성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카바레를 노려봤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곤이 그렇게 욕하던 그 카바레 한복판에서
경찰은 이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경찰청장과 우덕이
비싼 술상이 펼쳐진 VIP 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덕은 새 위스키 병을 번쩍 들며 말했다.

“청장님!! 이게 바로 저기... 머리 노랗고 코 큰 사람들이 마시는 정통 위스키라는 술입니다!!
전쟁통에 뭐 얼마나 피곤하셨습니까?
한잔 드시고 푹 쉬시지요~!”

청장은 잔을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고, 자네 덕분에 살겠네.
전쟁이 끝나고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오늘 이 ‘환대’, 절대 잊지 않겠어.”


우덕은 두 손을 비비며 활짝 웃었다.

“아이고~ 그 말씀이면 됐죠!
청장님만 잘 기억해 주시면 저는 더 바라지도 않습니다!!”

VIP 룸 안은 전쟁과 전혀 관계없는 천국처럼 떠들썩했다.


밖에서는 난민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떨고 있었다.
성곤은 어둠 속에서 펜을 꾹 눌렀다.

“이 미쳐버린 세상을 반드시 기록해 남기겠다.”

그 순간 카바레에서는
우덕과 청장이 잔을 부딪쳤다.
전쟁의 비명과
부산 카바레의 웃음이
같은 도시의 같은 밤에 공존했다.


부산이 난민의 바다로 뒤덮인 그 시각,
일본 도쿄의 한 고급 사무실에서
형준은 다시 카즈야 회장과 다나카를 만나고 있었다.

카즈야 회장은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허허허! 이젠 어엿한 회사 사장이 되었으니,
내가 함부로 반말하기도 어렵구먼!
이 참혹한 시대에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줘서 정말 고맙네, 형준 군!”

형준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저야말로... 회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다나카가 다가와 형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형준! 오래간만이다! 검도 한 판 붙어봐야지?
요새 검은 잡기나 하냐?”


형준이 피식 웃었다.

“형, 오래간만에 한번 붙을까? 나도 꽤 연습했지!!”

“됐어 인마! 검은 내려놓고 돈다발이나 움켜쥐고 사는 녀석이 무슨 검을 잡겠다고 난리야!
앉아. 술이나 진하게 마셔!”

셋은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후 규만까지 합류하자 분위기는 더 뜨거워졌다.


술이 몇 잔 더 오가자
카즈야 회장이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자네들 이만하면 성공했지 않나?
하지만 자네들은 여기서 멈출 사람들이 아닌 듯한데... 앞으로 몇백 년 가문을 이어갈 부의 축적을 어떻게 할 셈인가?”

형준은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제 아내입니다.”

규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수씨 판단이 제일 정확합니다.
저희는 제수씨가 방향 잡아주는 대로 움직입니다.”


카즈야 회장과 다나카의 눈이 커졌다.

“아내가? 그 서아 말인가?”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서아가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미국이 참전했으니 전쟁은 한쪽으로 기울 듯 보이지만
곧 공산당도 개입해 팽팽한 싸움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애매한 시점에서 휴전할 겁니다.”

카즈야 회장의 눈이 커진다.
서아는 계속했다.

“미국은 한국을 계속 지원할 것이고, 한국이 미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 가까운 일본 역시 빠르게 재건될 겁니다.
전쟁은 결국 일본에게 황금기를 열어줄 거예요.”

잠시 멈춘 뒤,
서아의 톤이 갑자기 단단해졌다.

“하지만... 너무 빠른 성장에는 반드시 큰 붕괴가 따라옵니다.
전쟁특수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과도한 빚을 내어 공장을 세우는 건 절대 안 됩니다.

빠른 성장은 빠른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카즈야 회장과 다나카는 말문이 막혔다.

서아는 과일을 내려놓고
조용히 고개 숙여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다나카가 형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도시대 명검보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제수씨’가 더 탐난다.”

형준이 껌뻑 놀랐다.

“아니, 형이 왜?”

다나카는 허허 웃으며 잔을 들었다.

“내가 맨날 너한테 서아랑 논다고 혼냈지?
근데 너는 지금 가장 강력한 검을 들고 있구나.
세상을 읽는 저 통찰력... 정말 놀랍다.”


형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전쟁 뒤의 거대한 변화를
아무 말 없이 건너다보듯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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