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초등학교] 89화 태극기 속에 가려진 것들

묵념보다 무거운 침묵

by 동룡

나래가 입원하고부터, 수빈은 혼자였다.

학교도, 학원도
항상 부모님이 데리러 왔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하루.
언제 어디서, 이유도 모른 채 맞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수빈은 요즘 매일 밤 악몽을 꿨다.
자기가 쓰러지고, 누군가가 소리치고,
모두가 자기를 욕하는 꿈.

학교에서 웃는 얼굴을 보아도,
그 안에 숨겨진 진심이 두려웠다.
방학만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월드컵으로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TV에선 연일 붉은 악마, 거리 응원, 태극기의 물결.
인성초 아이들 대부분은 얼굴에 태극기를 그리고
분식집 앞에서 치킨을 먹으며 소리쳤다.

덕군 컴퍼니는 VIP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쳤고,
온 동네를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수빈은 그런 데엔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그녀는 알았다.

자신은, 언제 어디서든 이유 없이 맞을 수 있다는 걸.

다음날 아침,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나섰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였다.

“얘들아,
우리가 월드컵을 즐기는 동안,
군인 아저씨들은 바다에서 북한과 싸우다가 돌아가셨어.”

교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건,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줬기 때문이야.
오늘 하루, 돌아가신 군인 아저씨들께 묵념하고 시작하자.”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 짧은 시간,
규만은 우덕에게 뭔가를 툭 속삭였고
우덕은 킥킥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민지가
규만의 팔을 꼬집었다.

“조용히 해, 지금은 그런 시간 아니야!”

그 옆에서 정연은
진지하게 눈을 감고 있는 형준을 보고 놀랐다.

“…이런 모습도 있었어?”

형준은 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

“응.
우리 외삼촌이 군인이거든.
이런 얘기 많이 들었어.”

잠시 멈추더니 진지하게 덧붙였다.

“하튼 저 북한 애들은 때려잡아야 돼.
나는 배웠어. 우리의 적은 북한이라고.”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준이가 이렇게 진지한 모습이라니,
선생님도 깜짝 놀랐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모든 북한 사람들이 나쁜 건 아니란다.
그 안에도 어려운 사람들,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아이들도 있어.”

수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맞아.
그중에도 분명 밥도 못 먹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을 거야.
우리랑 친구인데… 그런 애들은…
우리가 돈을 모아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교실 안이 정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건
역시 형준이었다.

“뭐?! 지금 그 돈을 적군한테 보내자고?
그 돈으로 참전용사 할아버지들부터 챙겨야지!!”

형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북한 애들 밥 못 먹는 게 그렇게 걱정되면,
너부터 밥을 좀 적게 처먹어, 이 돼지야!!
얼굴이랑 몸매만 불량한 줄 알았더니
머릿속까지 불량하네. 빨갱이 같으니라고!!”

“안형준!!”

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을 찢었다.


“그런 못된 말 또!!!
또!!! 상처 주는 말!!! 벌점이야!!!”

그녀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빨갱이라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절대 써선 안 되는 말이야!”

교실 안은 숨을 삼키는 듯 조용했다.

그 순간, 규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종북 세력…”

선생님은 번개처럼 반응했다.

“정규만!!! 너도 벌점!!!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쓰는 거야?!”


규만은 고개를 돌렸다.
말이 없었다.

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무서웠다.
정말, 한 마디를 꺼내는 것조차 두려웠다.

무엇을 말해도,
누가 들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비난뿐이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 오늘따라, 나래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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