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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1)

산은 나에게 무엇인가

by 김헌삼

내가 즐겨하는 것은 산행이지 등반이 아니며 등산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나로서는 송구스럽다. 내가 다니는 산들은 1천 미터 안팎의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와 능선들이므로 대부분 그 산정에 올라 땀을 식히며 아래로 펼쳐있는 세상을 굽어보기는 하지만 정상을 밟는 것만을 위하여 산에 가는 것은 아니다.

산속에서 호흡하며 산길을 끼고 돌 거나 산릉(山稜)을 오르내리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지 정상에 올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복감을 맛보기 위하여 산을 찾는 것은 아니다.

산은 심신에 산뜻하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곳이다. 산속에 들면 속세의 온갖 혼탁과 분잡(紛雜)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저절로 순화됨을 느낀다. 한편으로 힘에 부쳐 헐떡거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온몸에 다시 솟구치는 활력을 절감한다.

산은 마음의 오솔길과 같은 곳이요 사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산과 대하고 있으면 깊이 느끼고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아니 산중에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너그러워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듯하다.

내가 처음 산에 들어가 그 삽상한 산 내음과 싱싱한 숨결을 맛보기는 열 살 무렵 6·25 동란의 피난지였던 외가가 있는 충남 결성의 저울산이었다. 20여 가구의 초가가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 뒤로 둘러친 이 산을 찾게 된 것은 땔감으로 쓸 마른나무를 긁어온다든가 군것질 대용의 칡뿌리를 캐내기 위하여 산등성이를 헤집고 다니는 등 생계와 직결된 것이었지만 지금도 기억 속에 잔잔하게 남아있는 것은 양지바른 산기슭의 더할 나위 없는 포근함과 힘차게 뻗은 왕소나무의 청청한 가지와 그 사이를 가르던 세찬 솔바람 소리이다.

그 뒤로 5, 6년이 지난 뒤 처음으로 산의 정점에 올라 궁금히 여겨오던 산 너머 피안의 세계를 확인하고 일부 국한된 시야이기는 하나 하늘 아래 땅과 한낱 조그마한 인간의 마을을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곳은 우리 선대(先代)의 고향 청라에 있는 성주산(680m)으로 중학생 때의 일이라 기억된다.

직장에 들어가 60년대 말엽부터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주말 등산을 시작하여 여가선용으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으니 산은 내 생활 속에 크게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분 같아서는 매주 말이라도, 아니할 수만 있다면 매일 찾고 싶은 곳이 되었다.

산을 좋아한다니까 무더운 여름철이나 엄동설한의 겨울, 특히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날은 못 갈 것이 아니냐고 지레 걱정해 주는 주위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산행의 진정한 묘미는 악천후일수록 더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따뜻한 봄날 산골짝에 구름처럼 피어있는 벚꽃이나 산등성이에 불붙는 진달래를 완상 하는 감격이나 싱그럽게 피어오르는 5월의 신록으로 인한 신선한 충격, 선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며 마음이 허공으로 빠져들 무렵 오색찬란한 단풍 속에서 부딪는 뿌듯한 환희를 경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여름의 산행은 땀도 많이 흐르고 다른 때에 비하여 힘도 배로 더 들기는 하지만 산릉 위에 올라 흐드러지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일 때의 시원함이나 흐르는 계곡물에 몸을 담글 때의 전신에 짜릿하게 저려오는 상쾌함은 어찌 필설(筆舌)로 다 표현할 수 있겠으며 또한 산등성이고 계곡이고 온통 백설로 뒤덮여있고 나뭇가지마다 하얀 꽃이 활짝 피어있는 겨울 산의 장려와 순백의 미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날씨가 궂고 비가 오락가락하면 산에는 가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종종 있으나 비가 내리더라도 그만의 색다른 맛이 있고 우후(雨後)의 산은 한층 더 산뜻하고 정결하며 향기로운 산 내음을 한껏 접할 수 있어서 좋다.

이렇듯 산에 가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체내에 에너지가 충전됨과 동시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된다. 산의 아름다움은 춘하추동 사시사철 비 올 때나, 비 갠 후, 눈이 내리고 있을 때나 내려서 쌓인 뒤, 먼동이 틀 무렵, 햇살이 퍼지기 시작할 때, 양광(陽光)이 아낌없이 내리쬐는 한낮, 황혼 녘 각기 다른 산의 색채, 갖가지 산세와 바위의 형태, 심지어는 거기 군락 서식하는 동식물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느냐에 따라 뚜렷이 다른 멋을 보여 준다.

학문을 깊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산사(山寺)를 택하며, 도를 닦으려는 사람들은 왜 입산을 하는지는 지적 탐험에 앞서 산과 대면하며 마음가짐을 바로 하기 위함이며 산의 의연한 모습에서 무한한 것을 터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가 산에 가는 것은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인이 「산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를 붙이는 것은 아직 덜 산을 좋아하는 것일 것이다」고 하였듯이 내가 산에 가는 이유를 말하란 다면 한마디로 산이 좋기 때문이다.

산을 향해 나서는 것이 신명 나는 일이고, 산속에 들어있는 것이 기쁨을 누리는 일이며, 산을 다녀온 후 그 여운을 되씹어보는 것 또한 즐겁다.

대여섯 명의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산에 가기로 정해놓고 되도록 서울 근교를 벗어나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곳을 주로 택하여 실행해 왔다. 이 같은 산행을 수년째 계속해오고 있으나 당일치기가 가능한 경기도 한수(漢水) 이북, 강원도의 영동고속도로 부근, 충청북도 일대만도 산과 봉우리가 수없이 많아 갈 곳을 정함에 궁색하지 않다.

때로는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끼리 야유회 하는 기분으로 산을 찾아 새로운 분위기에서 팀워크를 다지기도 하고 또는 식솔(食率)이 함께 나서 위대한 자연의 품 안에서 오붓함을 맛보기도 하지만 나는 혼자 산행할 때도 드물지 않다.

홀로 산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남과의 약속으로 인하여 기다리며 허송하는 시간을 아까워하거나 기다리게 해 놓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때나 가기로 마음먹으면 쉽게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과 내가 단독으로 대면할 때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시간을 갖게 되며 쉽사리 생각에 침잠할 수도 있다.

산행에 ‘경제’는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며 산에 다니다 보면 건강은 저절로 찾아온다. 산은 높이 솟거나 낮게 엎드려 있거나 간에 전혀 교만함이 없이 의연한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계절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래서 누가 나더러 왜 사느냐고 물을 때 내 삶의 주변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선뜻 답하면 과언일까?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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