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 진달래
봄 산은 각양의 꽃들이 각색으로 다퉈 피어 화사하고 난만한 모습으로 있다. 5월의 높은 산들이 철쭉으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면 4월의 낮은 산들은 단연 진달래로서 돋보이려 한다. 진달래는 우리나라 산이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지천이지만 나에게는 그중 가장 빼어나게 보기 좋은 진달래 산은 화왕산(火旺山)이라는 생각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인근의 산, 자주 다닐 수 있는 일상의 산이 아닌 한, 당분간은 같은 산 같은 코스를 더욱이 계절이 같은 때를 택하여 가지 않는 것을 내 나름의 산행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 이유라면 기존해 있는 미체험의 산들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발굴, 개척되고 있는 새로운 산, 새로운 등산로가 아직도 많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왕산 진달래만큼은 처음 본 것이 가슴속 깊이 새겨진 감동으로 하여 4월 진달래 철에 맞춰 3년 동안 연속으로 찾게 되었다.
화왕산은 경남 창녕에 소재하여 서울에서는 큰 맘을 먹고 최소한 2일의 일정을 잡아야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갈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이 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85년 5월의 산지(山誌)에 글과 함께 실린 몇 장의 진달래 사진이 눈길을 끌어서이었으며, 그 후로도 매년 봄마다 진달래 산의 대표 격으로 소개되곤 하여 개화(開花)의 절정에 맞춰 한번 찾는 것이 나에게 지워진 의무처럼 생각되어 왔다. 화왕산의 진달래는 단순히 봄이 되었으니 꽃이 피는 것이라기보다는 산등성이를 진달래의 밭으로 온통 붉게 누비고 있어 육안(肉眼)으로 감상하면 가슴을 저리게 하고 혼을 얼얼하게 흔들어 놓으려는 야망의 화신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직접 접하고 이 기분에 흠뻑 젖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열망은 그 후 4년간의 인고 끝에 마침내 89년 4월 8일 토요일 밤을 기하여 무박 2일의 일정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창녕 읍내에서 바라보이는 산 모습은 아른거리는 이내 [嵐氣] 속에서 암청색으로 희미했으나 산행 리더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니 멀리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의 꼭대기 중앙 부분 오목 들어간 고개 바로 옆, 산자락에 붉게 물든 삼각지대가 선명하게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치 산이 걸쳐 입은 분홍 팬티가 살짝 드러나 있는 모양과 똑같아 보였으며 이곳 읍내 사람들은 집안에 앉아서도 산 위의 진달래가 어느 정도 피어있는가를 훤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산행은 시야에 들어왔다 벗어나고는 하며 점점 확실한 자태로 다가오는 진달래 무리를 목표로 계속된다. 이 진달래 무리가 군집한 곳을 환장고개라 부른다는데 '환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고개 위를 막바지로 하여 한동안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줄곧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라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아니면 이토록 무릅쓴 고역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이 되고 남을 만큼 고개 위 능선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의 장관에 환장할 지경이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고개에 올라서면 바로 화왕산성 안이 되고 여기서 둘러보는 산세는 여느 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임을 직감케 된다. 산성의 왼쪽으로 2백여 미터 떨어져 있는 정상(756m)과 오른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배바우(742m) 사이의 성내는 완만한 V자형 분지이다. 나무라고는 하나 없이 이른바 '10 리 억새밭'으로 풀만 가득하며 부드럽기 짝이 없는 평원이다.
같은 억새평원이라도 영남알프스의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신불, 간월산을 잇는 지역이나 천황산과 재약산 사이의 사자평 억새를 그저 무한한 것 같은 억새 천국이라 한다면 화왕산의 것은 성안이라는 한정된 지역 내의 새 풀이다. 성 밖으로는 암릉과 진달래밭이 어울려 펼쳐있어 성안과 밖이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각각 독특한 멋을 풍기고 있다.
산성을 중심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몇 군데의 진달래 군락은 그중에도 특히 돋보인다. 환장고개 오른편에 덩어리 지어 펼쳐있는 진달래 군(群)의 난만과 화사함은 갓 올라와 숨 고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진달래 축제의 팡파르라면 동문(東門)으로 빠져나가기 전 옹달샘이 있는 성터 외각 아래 널린 진달래 무리는, 뒤편으로는 푸르른 소나무들, 앞쪽으로는 한 길쯤 되는 억새들 사이에서 색채와 형태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는 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취사 준비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양다리를 쭉 뻗고 누워 팔자 좋은 휴식을 취하는 청년. 진달래꽃들을 뒤로하고 서서 사진 촬영을 하는 무리. 어디론가 다시 떠나기 위하여 구부려 배낭을 챙기는 사람 등등. 이들은 모두 적절하게 배치되어 각각 다른 동작과 자세로 자기 배역을 열심히 해내고 있는 모습이다. 잘 어우러져 마치 막이 오르고 난 직후 연극무대의 한 장면이다.
어찌하여 눈앞에 전개되는 만물의 현상들은 형태와 색채조화의 다름으로 어느 것은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즐거운 감정을 갖게 하고 또 어느 것은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슴 깊이 진한 감동으로 와닿고 기억되어 두고두고 생각나게 되며, 사람은 왜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이런 감정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게 되는가.
동문 밖으로 멀리 연이은 관룡산(觀龍山)이 바라보이는 능선을 달리며 전개되는 진달래 평원이나 정상에서 목마산성으로 내리며 산 전체에 널려있는 진달래밭은 넓은 지역에 산을 온통 환상의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장관을 이뤄 가히 진달래꽃구경의 절정이라 할만하다. 잡목 없이 키 작은 억새풀과 간혹 잔솔을 바탕으로 하여 밀생 한 진달래의 관목에 잎이 돋기 전 줄기마다 꽃만이 정생(頂生)하여 몰아 피어, 널리 퍼져있으니 진달래로 수놓은 천연의 양탄자 위에 벌렁 누워 따스한 봄날의 양광을 흠뻑 받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야 하는 것은 왔다가는 또다시 갈 길이 바쁜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환하여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에서 순간순간 클라이맥스를 포착하려는 노력이 있어도 그것이 꼭 맞아떨어지려면 운도 많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은 서울에서 지내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 동안은 화왕산을 손쉽게 찾아가기 어려울 터이므로 첫해에 경험했던 그 황홀경을 재음미하기 위해서는 남쪽으로부터의 꽃 소식이나 듣고 멀어져 가는 옛 기억을 되살려봐야 할 것 같다. (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