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산행
학창 시절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 있으면 하루의 시작은 으레 아침 일찍 일어나 뒷산을 돌아오는 것이었다. 잔솔밭을 헤치고 극심한 가뭄이 있을 때면 동네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는 매봉을 거쳐, 산등성이 너머 우리 큰 밭 자리를 둘러보고 기다란 논둑길을 따라서 돌아오면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계절에 따라 여름철에는 아침이슬을 털며 물기 머금은 나무들이 풍기는 청량감을 흠뻑 맛보거나 싱그러운 새 풀 냄새와 부산한 새들의 지저귐에 취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간밤에 소리 없이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뒤덮인 산야에 옥양목처럼 깨끗해지는 마음을 숫눈 위에 발자취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몸에 밴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스러움, 산을 거닐며 갖는 신선함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후에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산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타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살면서 몇 번 집을 옮겨 다녔으나 가는 곳마다 아무 때고 마음대로 다가갈 수 있는 가까운 산이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옥인동 꼭대기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빌려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북악스카이웨이를 끼고 지나는 인왕산 허리가 우리 살던 지역이었다. 이 길을 따라 걷는 이른 아침 산책은 뜰 없는 아파트생활자의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당시 길 위쪽 산으로의 진입은 엄격히 통제되었으므로 부근 스카이웨이를 출근 시간에 맞출만한 여유를 두고 짧은 시간 오르내리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산허리에 즐비하게 피어있는 진달래를 관상(觀賞)하거나 길가 숲 속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노인들의 활기찬 모습을 대하는 것으로도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약 일 년 반을 살다가 옮겨간 불광동집에서는 십 분쯤 걸어 기독교수양관을 지나서 불광산이 있고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인왕산에서와는 달리 산정을 향하여 가고 싶은 데까지 마음대로 올라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바위산이라 숲이 무성하지는 않았으나 산 중턱쯤에 물이 고이는 향림담(香林潭)이라는 목욕 소(沼)가 있었으며 여기서 몇몇 사람들 틈에서 냉수욕을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여름철은 말할 것도 없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까지도 특히 쌀쌀한 날씨에 찬 물수건으로 몸을 비비고 옷을 걸칠 때의 뼛속까지 젖어드는 상쾌한 맛과 포근한 느낌은 온종일 간직되는 소중한 것이었다.
당시 이곳에서의 일로 기억에 남는 것에 산에서 만나곤 하던 어느 비대한 남자의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처음 눈에 띄었을 때 그는 큰 키에다가 몸집이 우람하여 땀을 몹시 흘리며 힘겨운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놓는 상황이었다. 내가 산에 가는 아침에는 언제나 그가 눈에 띄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이 산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녔던 것 같다. 그는 목욕 소 아래 편편한 바위 위까지 와서는 두 손을 높이 올리고 흔들어 대며 깡충깡충 뛰고는 했다. 그 모양은 마치 장대한 어른으로서 어린애들이 하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라는 부분의 무용 율동을 반복하는 것으로 연상되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의 산 오르는 품은 어느새 아주 가볍고 노련미가 배어있었으며 몸매도 한결 군살이 빠지고 균형 잡힌 것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이곳을 떠나며 그를 대면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를 떠올려보면 아마도 산행의 베테랑이 되어 이 산 저 산 누비고 다닐 늠름한 모습으로 어느 산길에선가 불현듯 만날 것 같다.
런던에서의 3년은 어쩔 수 없이 산을 멀리하고 지낸 시기였다. 곳곳에 공원은 많았으나 런던 근교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지방에는 오를 만한 산이 전혀 없어 회상으로나 그려 보던 산행의 갈증은 결국 귀국하여 풀어야 했다.
새로이 입주한 서초동 아파트에서는 버스를 한번 타고 조금만 걸으면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어 다녀올 수 있는 우면산이 있었다. 높이 290 정도의 낮은 산이었으나 산로(山路)가 아기자기하여 갔다 온 뒤의 기분이 더없이 상쾌하였다. 산에 들어서면 갈잎나무 숲과 소나무 군, 아카시아들이 무리 지어 있는 곳 등, 산의 요소를 고루 갖춘 곳이었다. 조망이 좋은 산상 부근에는 앉기 편한 너른 바위가 있으며 코스도 다양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바꿔가며 다닐 수 있고, 봄이 되면 길옆으로 무더기로 피어있는 진달래의 불타는 아름다움은 깊은 산의 그것 못지않았다. 특히 소라아파트 쪽에서 시작하여 정상 부근 약수터로 향하는 오솔길은 실로 호젓하고 아늑하였다. 서초동에 살면서 일주일의 반 정도는 아침으로 이 산에 다녔던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는 가락동은 일상으로 다닐 산이 마땅찮다. 주중 아침 출근 전 다녀오기에 남한산성은 너무 거리가 있고, 대모산이나 구룡산은 차편이 불편하여 망설여진다. 기껏해야 아주 가벼운 산책이지만 오금공원이라는 녹지를 들러 오는 정도이니 성에 차지 않는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산의 신선한 공기와 정령(精靈)으로 몸과 마음의 불순물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자의 행복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잘 풀리지 않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원인 모를 허무감에 빠져들 때 산속을 거닐면 거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장래 내 집은 곧바로 찾아갈 수 있는 높이 3, 4백 미터 정도의 뒷산이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집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이 둘러있어서 까치가 가끔 내려와 새벽을 깨면 그날 꼭 기쁜 일이 있기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 소리를 반가이 맞는 것으로도 족하리라.
순환하는 사계(四季), 교차하는 밤낮의 어느 한때, 해 뜰 녘, 황혼이 깔릴 때, 나뭇가지 사이로 별들이 총총 빛날 때, 또는 별도 달도 없는 칠흑의 밤 등. 시도 때도 없이 언제라도 생각 키는 대로 찾아볼 수 있는 산 ―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조용히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이 서 있는 나무들의 숭고한 모습. 묵은 갈잎들 사이로 작은 꽃 풀의 새싹이 올라오는 신비로운 순간. 비 갠 후 수목 사이로 비쳐드는 찬연한 햇살과 물기 머금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싱그럽고 감미로운 향내. 순간순간의 참신한 현장을 불현듯 찾아 달려 나갈 산이 집 가까이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는 이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하루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