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먼 산 가까운 산(4)

by 김헌삼

백운산 선유기(仙遊記)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운산(白雲山)을 처음으로 찾은 것은 84년 5월 다람쥐산악회를 따라서였다. 특별히 이 산을 점지해 뒀던 것은 아니고 당시 미답(未踏)의 산들을 하나씩 경험의 산으로 바꿔가고 있을 무렵이었으므로 전혀 우연한 결과였다.

그때 갔던 코스는 지금 기억에 어렴풋하지만 수천 년 또는 헤아릴 수 없이 장구한 세월을 두고 씻기고 닦여 하얗게 바랜 것 같은 암반과 바위들, 그 사이로 그지없이 맑고 깨끗한 물이 급하고 힘차게 흐르며 희디흰 포말(泡沫)을 이루던 계류가 퍽 인상적이었다. 계곡 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수목마다 새잎이 피어나 싱그러움이 절정인 가운데 돌배, 보리수, 산목련, 수수꽃다리 등속의 나무들에는 꽃들이 하얗게 또는 선녀의 옷자락 같은 연분홍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이들이 다투어 내뿜는 여러 가지 향내가 뒤섞여 온 산골에 가득한데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 나비의 몸짓에는 춘흥(春興)에 겨워 파닥이던 모습들의 기억이 선하다. 말로만 듣고 상상으로나 그려 본 무릉도원이라는 곳이 여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비경의 이미지는 많이 손상되었겠지만 그래도 맑고 깨끗한 계곡의 매력은 변함없을 것이므로 친구와 함께 가족나들이로 백운산행을 다시 시도하게 되었다.

지난 주중에는 많은 비가 내렸으므로 만개했던 꽃들은 대부분 앞당겨 저버렸을 테지만 그 대신 새로이 돋아난 꽃망울들이 터지고 나뭇잎 또한 급속하게 활짝 필 것이며 계곡물은 크게 불어 철철 넘쳐흐를 것으로 기대가 컸다.

해발 6백 미터가 넘는 광덕고개까지 차로 가서 그곳을 산행기점으로 하여 정상까지 올랐다가 백운계곡을 거쳐 흥룡사 입구로 빠지는 코스가 요즈음 애용되고 있는 모양으로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흥룡사 입구에서 고개 위 광덕휴게소까지는 산허리를 끼고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찻길로 7킬로. 휴게소가 있는 광덕고개는 캐러멜고개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거기에는 6.25 당시 어느 부대장이 고개를 넘을 때 피로에 지친 운전병의 졸음을 막기 위하여 캐러멜을 주며 무사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고개에 내려서니 제법 강한 바람과 더불어 찬 기운이 확 끼친다. 자연히 산행을 서두르게 된다. 산꼭대기에 거의 다 와서 오르기 시작한다는 안일한 선입관에 일격이라도 가하듯 댓바람에 급한 오르막길이어서 이래저래 정신을 가다듬게 된다. 그러나 산길이 줄곧 부드러운 육산(肉山)의 오솔길이어서 호흡과 행보의 박자가 잘 조화를 이뤄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다. 올랐다가는 내리기도 하며 땀도 적당히 흐르고 힘을 들였다 늦췄다 하며 쫓는 정상은, 손에 잡힐 듯하다가는 멀리 달아나고 이 봉우리만 올라서면 되겠거니 하면 더 높은 산봉(山峰)이 건너편에서 어서 오라 손짓을 보내는 듯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언제나 바로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우선 가야 할 대상으로 삼고 도전한다. 이것을 극복하고 보면 더 높은 목표가 닥쳐있고 또 전열을 가다듬어 그곳을 향하기를 반복하다가 더 오를 곳이 없어지면 내려오게 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삶과 같은 이치요, 인생사에 두루 통용되는 진리일 것이다.

904미터 높이의 백운산 정상 부근, 또 정상에서 더 남쪽 도마치봉으로 향하는 능선 길은 새로운 경이의 세계였다. 갖가지 야생화들이 피어나 꽃의 낙원을 이루고 있었다. 꽃들은 작고 가냘프며 색조가 단순하고 조촐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예쁘고 귀엽고 기묘하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길섶에 하나둘 외로이 피어있기도 하지만 산자락을 쫙 덮고 있는 무리도 만난다. 야!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진다. 일행들은 앞에서 놀라고 뒤에서 감탄하며 서로 불러 세우니 발걸음은 자연 늦어져 휴게소에서 도마치봉에 이르기까지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도마치봉(937m)을 올랐으므로 이제는 가장 짧은 코스로 하산해야 할 텐데 어림잡아 봐도 아득한 느낌이다. 더욱이 우리가 가려는 방향에서 올라오는 사람 말에 의하면 길이 좋지 않다는데 초심자인 가족들(벌써 세 시간을 걸어 어느 정도 지쳐 있다)을 이끌고 지리멸렬하게 내려갈 생각을 하니 낭패감이 앞선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수없이 물어올 것이고 그때마다 궁색한 답변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도 벌써 얼마나 힘겨운 걸음을 떼어놓고들 있는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11시가 지나고 있을 뿐으로 시간의 여유와 함께 앞으로는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내림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능선은 칼날 같고 경사는 매우 급하여 오름 길 못지않게 힘이 든다. 길은 험난하나 반면 험한 길이 오히려 수려하기는 하다. 소정(小亭)이나 심산(心汕)의 산수화에서 보는 것처럼. 독버섯의 색깔이 곱듯이. 곳곳에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저 아래에서 희미하게 바람 소리 같기도 한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계곡의 발원이 가까이 있으리란 희망을 품게 하는 음신(音信)이다.

물은 동력(動力)의 원천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 들어도 쌓였던 피로는 깨끗이 가시고 저절로 기운이 솟는다. 드디어 부엽(腐葉) 사이로 졸졸 구르는 물줄기가 보이고 이 골 저 골에서 모여들어 점점 수량이 불어나더니 희디흰 암반과 바위 돌들 사이로 큰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다.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골 물이 수루루룩, 저 골 물이 솰솰, 열의 열 곳 물이 합수하여 천방져 지방 져 소쿠라져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같이 흩어지니’하는 「유산가(遊山歌)」의 한 구절이 잘 어울리는 경관이 예 아닌가 싶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맑고 깨끗하고 싱그러우나 그중 더 아늑하고 더 안락한 자리를 차지하여 시장기를 채우고, 우리는 할 일을 모두 끝낸 사람들처럼 한없이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아이들이 흐르는 물에 꽃잎을 띄우며 희희낙락하는 동안 우리는 백옥 같은 계류에 손을 축이다가 발을 씻기도 하고 급기야는 몸을 담근다. 그리고는 신선이 되어 귀갓길에 오른다. (92.6)



작가의 이전글먼 산 가까운 산(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