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소감(4)

by 김헌삼

4. 관덕정 주변 산책


관덕정(觀德亭)은 구(舊) 제주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시내로 진입하면 첫눈에 들어오는 옛 건축물이다. 크기가 정면 5칸 측면 4칸짜리 단층 팔작지붕으로 창호문 없이 사방이 툭 터진 기둥만의 정자 형식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여섯 명의 노인이 모여 앉아 부채나 부치며 한담을 나누거나 시조를 읊조리는 정자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이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세종 30년(1448) 제주 목사 신숙청(辛淑晴)이 그 앞 광장에서 병사의 훈련과 무술 수련을 지휘하고 사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고 그 밖에도 관민이 함께 공사(公事)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으로, 또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관덕정에서 관덕은 '사이관덕(射以觀德)'에서 따온 이름으로 활쏘기가, 평시에는 심신을 연마하는 것이라 한다면 유사시 나라를 지키는 것인 까닭에 이를 보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행을 보는 것과 같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관덕정이 자리한 주변은 고려 때 탐라국이 탐라군(郡)으로 편제되어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할 때부터 최근까지 줄곧 제주의 정치, 경제, 행정, 문화의 일번지로 군림해 왔던 곳이다. 마치 서울의 광화문 앞으로 세종로 넓은 길이 펼쳐있는 것처럼 관덕정은 중앙로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관덕로의 중심에 서있다.

시류의 변화와 규모의 확대에 따라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몸집을 불릴 수 없게 될 때 옮겨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이므로 인근에 있던 주요 기관들이 모두 신(新) 제주로 이전하고 우체국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어서 부산하게 차들은 오고 가지만 이제는 속 빈 강정 같은 허전함이 있다.

관덕정은 지금 현대식 건물 속에 묻혀 있어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므로 건립 당시의 주변 정황은 어떠했는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제주에 살고 있던 1년 사이에 이 지방의 양대 신문에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라는 그림이 해설까지 덧붙여 크게 시리즈로 소개되고 있었다. 『탐라순력도』란 숙종 28년(1702) 간 제주목사로 있던 이형상(李衡祥)이란 사람이 제주도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역사·지리·풍물과 풍속·방위시설 등을 글과 그림으로 세밀하게 담아낸 제주지(濟州誌)로서 사진이 없던 그 시절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사실에 근접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것 같아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 순력도는 이형상 목사의 종손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을 마침 제주시와 제주박물관에 의해 원본 그대로의 영인본을 펴냄을 계기로 총 40점 가운데 20여 가지를 임의로 뽑아 하나씩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덕정의 모습이 나오는 그림은 「건포배은(巾浦拜恩)」, 「제주조점(濟州操點)」, 「제주전최(濟州殿最)」 등인데 주요 건물의 배치상황이 모두 같아 사실에 충실하게 묘사했음이 분명하다. 그중 『제주전최』라는 제하(題下)의 도면은 사진에 버금갈 정도로 아주 상세하고 조화 있게 그린 것이었다.

'殿最(전최)'라는 용어가 나로서는 생소하여 국어대사전을 들춰 찾아봤더니 '관원들의 근무성적을 심사하여 우열을 매기는 일'이라 하고 '주로 지방관(地方官)의 전최를 중요시 여겨 중앙에 보고하며, 성적을 고사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했음'이라 되어 있었다.

『제주전최』는 관덕정을 중심으로 하여 좌측으로는 주로 군관청(軍官廳)과 부속 건물들이 서너 줄로 늘어서있고 우측에 목관(牧官)을 비롯하여 관청과 직속 군관청 및 민가들이 모여 있는데 관덕정 앞 광장 전방에 3개의 과녁을 놓고 관원들의 활쏘기 실력을 테스트하고 있는 듯 관덕정 안 정면 앞쪽에 일렬로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세 명과 건물 안쪽과 광장 좌우로 부속건물들에 바짝 붙어 늘어선 사람들이 누구 실력이 어떤가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관덕정 뒤로는 제주성(城)도 둘러싸고 보이지는 않지만 관덕정 바로 뒤에 아마 서문(西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백여 년이 흐른 지금, 관덕정을 제외한 모든 건물과 성곽조차 사라지고 없다. 다만 옛 건물들이 있던 터를 발굴하여 흔적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봉직하던 제주지점은 50년대 초에 개설된 몇 되지 않던 점포 중의 하나로 제주시의 가장 핵심이 되는 1도 1동에 직원 숙소건물까지 사무실에서 코 닿을 자리에 위치하여 주야와 조석을 가리지 않고 관덕정 주변을 맴돌며 지내는 형편이었다.

어디를 가나 바뀌지 않는 습성으로 일찍 자고 일찍 깨다 보니 아침산책을 나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인적이 드문 관덕정 주변을 걷거나, 바다 내음 물씬 풍겨오는 방파제 길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부두의 수산물종합어시장을 기웃거려 무슨 고기들이 잡혀 들어오고 있는지 구경도 한다. 운동량이 좀 미흡하거나 시간이 남으면 제주북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특히 관덕정 부근은 노거수(老巨樹)와 수려한 모양의 키 큰 적송들이 적절히 배치돼 있어 차량이나 행인들이 별로 없는 새벽녘 효무(曉霧)가 나무들과 신구건물 사이에 어렴풋이 걸쳐있는 모습은 한 폭의 좋은 그림이었다. 이곳을 지나치면서 재미있는 비(碑)를 하나 발견하였는데 거기에는 '守令以下皆下馬(수령이하개하마)'라 씌어있고 이것은 비록 내 생애 여기서 처음 본 것이지만 어려운 내용이 아니어서 '수령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뜻임을 알아차리고 웃음이 저절로 터졌으며 이 부근이 관아 터임을, 관청의 위엄이 역시 대단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건대 고증자료도 있고 지금의 관청들은 모두 옮겨갔으니 이 자리에 옛 건물들을 복원한다면 아주 훌륭한 역사 되살리기와 함께 값진 관광자원이 될게 확실하리라는 의견이다. 이미 고층건물이 새로 들어서 있기도 하여 고충이 없지 않겠지만 장기적인 계획 하에 부분적으로,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감이 어떨까 한다.

도청이나 경찰서 등 중앙관서는 신제주로, 관광의 중심은 서귀포나 중문의 해안으로 이미 옮겨간지 꽤 되었지만 그래도 관덕정과 그 주변은 영원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일대는 제주 역사의 중심 무대이고 산 증인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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