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산간 억새꽃 무리
제주에서 가장 가을다운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벌판 도처에 허옇게 피어있는 억새꽃 무리가 아닐까. 귤림추색(橘林秋色)이라 하여 크고 작은 과원(果園)의 귤들이 익어가며 야반 도시의 불빛처럼 동글동글한 모습이 하나둘 노랗게 드러나기 시작할 때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지만, 그것으로 가을 기분에 흠뻑 젖어들지 못하는 것은 그 나무의 잎들이 싱싱한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주도의 가을은 억새꽃의 흔들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가을이 다할 때까지 계속된다.
영주십경(瀛州十景), 때로는 12 경이라 하여 성산 일출을 비롯하여 열두어 가지 제주도의 절경이 설정돼 있기는 하나, 보는 이들의 생각에 따라 그것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일 년 남짓 지내며 보고 느낀 일천한 경험을 토대로 제주를 아름답게 꾸미는 대표적인 경관을 내 나름대로 꼽아본다면, 겨울이 깊어갈수록 한라산 정상부근에 흰 눈이 내리면서 쌓이고 또 쌓여 자아내는 환상적인 설화(雪花). 그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상태에서 따스한 봄기운이 기지개를 켜며 낮은 지역으로부터 퍼져 올라올 때 해안 가 들녘을 노랗게 수놓는 유채밭의 화사한 풍경. 오뉴월 초여름 한라산 1천5백 고지 위 넓은 고원지대에 바다 물결처럼 무더기무더기 피어나는 철쭉꽃 군락의 파상(波狀). 그리고 산자락 허허벌판에 잡초로서 자라나다가 가을 내내 군중들의 깃발인양 너울거리는 억새꽃 무리를 들고 싶다.
억새에는 한 식물이 생장하다가 일생을 마치며 소멸해 가는 자연현상으로만 볼 수 없는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제주 섬은 해마다 여름철 강도 높은 위력으로 찾아오는 태풍처럼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으며, 근래에는 숱한 민초들의 생명을 초개같이 스러지게 한 4.3 사건 등 아픈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은 비운의 역사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중들, 그들이 흘린 피와 떠돌던 넋들이 억새로써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부산업도로의 이시돌목장 부근이나 산굼부리 쪽 한적한 길을 따라 달리노라면 무리 지어 바람에 떠밀리는 듯한 은백색 억새꽃의 흔들림을 보면서, 광활한 초원의 적막함을 느끼며 동시에 정적만이 감도는 평화스러움을 함께 맛본다. 그리고 이러한 적막과 평화 속에 숨어있는 듯한 수난과 격동의 제주 통사(痛史)를 되새기게 된다.(9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