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와 나
산에 가면 꼴 보기 싫은 놈이 딱 하나 있다. 그곳이 온통 제 세상인 양 한없이 설쳐대는 청설모란 놈이다. 옛날에는 청설모라면 붓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는 털로만 알았지 눈을 씻고 봐도 띠지 않던 것들이었는데. 어디에서 함부로 굴러먹던 것들이, 언제부터 이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우리나라 토종 다람쥐들이 쪽도 못 쓰고 시나브로 쫓겨 어디로 갔는지 씨가 마를 지경이다.
내가 이놈들을 싫어하는 데는 마음 한구석에 쌓인 보복 심리도 작용하는 듯하다. 산길을 홀로 가고 있는데 앞쪽에 탐스러운 밤송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속이 꽉 들어차고 통통하게 여문 것이. 횡재한다는 기분에 설레기까지 했다. 다가가 덥석 주우려는 순간 저만치 달아난다. 희아! 이상타. 바람에 굴러가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밤송이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바퀴가 달린 것은 더욱 아닐 텐데. 고얀 생각을 품은 채 또 다가가 이제는 됐거니 가만히 들어 올리려니 다시 앞쪽으로 움직인다. 이러기를 몇 차례 했는지 모른다.
그제야 가시투성이의 밤송이를 교묘하게 물고 있는 청설모란 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것도 못 깨닫고 밤송이에만 눈독을 잔뜩 들였던 어리석은 자신이 한없이 측은하고 한스러웠다. 그날 산행기분을 싹 잡쳤던 것은 물론이다.
그때부터 청설모란 놈은 철천지원수처럼 보였던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다지 굵진 않지만 꽤 높은 나무 가지에 청설모가 앉아 나를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옳다 꾸나. 맛 좀 봐라. 다가가 확 흔들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제 아무리 나무 타기에 신들린 재주가 있다 하여도 내 급습에 속수무책(束手無策), 아니 속족무책(速足無策)으로 나무에서 이탈하여 화사한 봄날 꽃잎 날리듯이, 겨울 눈발 펄럭이듯이 떨어지는데. 통쾌함보다는 그 낙하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너는 뇌진탕이다 하는 생각으로 바뀌려는 찰나 다른 나뭇가지에 사뿐히 옮겨 앉는 것이었다. 청설모에 대한 미움은 배가되어 버렸다.
내가 어떤 놈인가. 당하고 호락호락 넘어갈 상대가 절대 아님을 보여줄 날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바람 불고 비가 흩뿌리는 초가을 날이었다. 아침 일찍 동네 뒷산 밤나무 밑을 어슬렁이는데 아! 이게 웬일, 큰 밤송이들이 땅바닥에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여기저기 누군가가 탐스런 송이 있는 가지 부분을
똑똑 꺾어 내린 것처럼 예쁘게.
우선 점퍼를 벗어 보자기 모양을 하여, 주섬주섬 주워 담고 있으려니 무슨 기척이 있다. 전후좌우 두리번거리다가 위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무 위에 청설모란 놈이 웅크리고 앉아서 원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애써서 건너 다니며 끊어놓았음에 틀림없는 것들을
하나라도 건지기 전에 내가 도리를 해버렸으니 얼마나 분통 터지고 억울했으랴.
청설모와 나 사이에도 암암리에 이런 일들을 주고받으니 이 세상은 살만하고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