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년고도 경주
출행(出行)을 앞두고 신종플루 확산 소식과 때아닌 이상 한파가 닥치고 비라도 올 듯 맑지 않은 날씨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계획대로 출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강행키로 한다. 마음은 편치 못했으나 다행히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출발 당일 아침에도 빗물 머금은 길바닥과 구름 낀 하늘이어서 심상(心狀)은 ‘흐림’이었지만, 수도권을 벗어나 남으로 향하며 점차 개이고 따스하게 퍼지는 햇살을 보게 되며 ‘맑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나 고교동창들 모임에 나가면 서로 간에 대하는 태도와 오고 가는 말이 저절로 나어린 애들의 그것으로 되듯이, 대학 동문들과 함께할 때는 모두들 70 언저리에 있는 지금도 마음은 언제나 20대 초반 대학 시절 젊음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가을기행은 학창 시절 그놈의 고시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단체수학여행을 이제야 제대로 해보는 것으로 생각되고는 한다.
서른 살에 가든 마흔 살에 가든 더 늙어서 가든 경주로의 여행은 언제나 「수학여행」이라 했으니, 이번에는 더욱 그러하다. 경주는 천년고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김 O원 동문에 의하면 이스탄불 (330~1923)에 이어 경주(BC57~935)가 두 번째로 오랜 기간 수도로 존속했으며 천여 년의 세월을 기록하고 있는 곳은 이 둘밖에 없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타고 4시간 이상 남하하며 두어 차례 휴게소에 잠깐잠깐 들렀지만 경주에 도착하여 처음 제대로 시간 여유를 갖고 머문 곳은 대릉원(大陵苑) 앞 신라회관이었다. 여기서 오찬을 즐기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식사 후 대릉원 주변 길을 걸으니 친숙한 첨성대가 한눈에 다가오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에 계림(鷄林)이 자리 잡고 있다. 계림 숲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경주 김 씨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는 곳이다. 전설이 믿어지지 않거나 그래도 믿고 사는 수밖에 없거나 간에 그 먼 옛날 탈해왕(57-80) 시절이라 하니 약 2천여 년 전이다. 어느 날 이 숲에서 이상하게 웬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한 나뭇가지에 빛을 발하는 금궤가 걸려있었으며, 이 금궤에서 나온 잘 생긴 사내아이가 경주 김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나무로 추정하고 싶은 고목은 전신에 콘크리트 붕대를 감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지의 6 세손 미추가 김 씨 성으로는 처음 왕위에 오른 후, 김 씨들 위주로 7백여 년간 신라를 지배하며 번성하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김 씨 성의 반 수 이상이 이분 후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주에는 값진 문화유산이 무수할 것이지만 하루 이틀의 일정으로 어찌 이들을 광범위하게 꼼꼼히 챙겨볼 수 있겠는가. 불가피 특출한 몇몇을 선별하게 되는데,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감은사지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 세 곳이 오늘 우리 일정에 알차게 들어있을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불국사를 보고 나서 멋지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불국사를 보고 나서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얼굴이며 한국미의 한 상징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조화적 이상미와 세련미를 보여주는 신라문화의 정수이자 완결 편」이라고 극찬했다.
보는 이의 주관과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감상 포인트에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대웅전으로 향하기 전 자연석과 가공의 돌로 쌓아 올린 석축, 청운교 백운교 계단으로 올라서 중앙에 자하문을 중심으로 한 회랑, 좌우 범영루와 좌경루가 조화를 이룬 불국사의 빼어난 미관 앞에서 벅찬 감동을 느낀다. 몇 걸음 물러서서 엇비스듬히 서 있는 노송과 거수(巨樹)들 사이로 보는 전경은 최상급의 아름다움이라 하고 싶다.
빙허 현진건이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미인(盛裝美人)」에 견준 국보 20호 다보탑과, 「수수하게 차린 담장미인(淡裝美人)」으로 비유한 국보 21호의 석가탑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돌을 마치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한 석수의 솜씨에 탄복한다. 이들을 거느린 대웅전 뒤쪽 높은 곳 관음전 앞뜰 한쪽에 비켜서서 대웅전 팔작지붕선 너머로 두 탑의 상층 탑신을 내려다보는 것 또한 좋은 감상 구도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보탑을 전면 해체보수하고 있어 제 모습을 접할 수 없었던 것은 유감이다.
불국사를 나와 포장도로를 따라 토함산 석굴암으로 향한다. 토함산 포장도로는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5,60년대에는 동해 일출을 함께 보기 위하여 동트기 전 새벽에 선잠을 깨 가쁜 숨을 몰아쉬며 1시간 가까이 걸어 오르던 흙길이었다. 이제는 석불사로의 10여분 거리 주차장까지 버스로 오르니 그만큼 시간과 힘을 비축할 수 있다.
고은 시인은 석불사 석굴 앞에서 「모든 이 나라의 찬미(讚美) 형용사는 그곳에 모여들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른 것을 찬미하기 위하여 나갔으니 석굴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유홍준은 그의 저서에서 이를 두고 「완벽한 인간공력이 이루어낸 경이로움만 말할 수 있다.」고 하며,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아침 일찍 서둘러 여기까지 먼 길을 찾아온 우리는 석굴암 앞에 섰다. 전각(殿閣)을 지어 앞을 가리고 유리 벽으로 차단하여 이들의 찬사를 음미할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봐도 본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안 본 것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중앙의 본존불과는 정면으로 대할 수 있었으니 감은 듯 뜬 듯 그윽한 눈길, 지그시 다문 듯 적당히 두툼한 입술과 온화한 얼굴 표정을 읽으며 번잡하던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말은 하고 싶다.
연장이라고는 정이나 망치가 고작이었을 1,300여 년 전 얼마나 많은 손길과 땀과 열정을 쏟아부었으면 저런 정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겠느냐며, 화강암으로 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품이라고 일본 중국 사람들도 입을 모아 칭송한다는 김O원 동문의 말이다.
5시가 조금 지난 어스름 무렵 김O학 동문이 “사과는 말고 감은 사지.” 빗대어 농담한 감은사지(感恩寺址)에 도착했다. 용당리 낮은 산자락, 너른 절터에 오직 삼층 석탑 두 기만 덩그마니 서있을 뿐이다. 모양과 크기가 같은 두 탑의 풍채가 워낙 장대하고 위엄 있는 품새여서 사찰 건물들 없는 이 모습이 주위 경관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출몰하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해가 보이는 이곳에 역사(役事)를 시작했으나 맺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즉위해 이듬해(682) 완성했다고 한다. 금당(金堂)의 기단 아래 공간을 두어 이곳으로 부왕이 해룡(海龍)으로 화신 하여 드나들도록 하였으며, 또 유지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로 했으나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며 불그스름히 노을 진 산 능선을 배경으로, 위로 치솟은 두 탑의 실루엣을 한 폭의 좋은 작품으로 기억하며 이곳을 떠난다.
미주(美酒)와 가효(佳肴)를 곁들인 만찬을 마치고 거나한 기분으로「한우리가든」 뜰로 나오자 깜깜한 하늘 저편에 마침 밝은 달이 떠올라있다. 이때 생각나는 그 노래가 나로서는「신라의 밤」이었던지 「신라의 달밤」인지, 또 부른 가수가 현인인지 명국환인지 기억이 확연치 않건만 취흥이 한껏 오른 노O호와 정O일 동문이 ‘아~ 신라의 밤이여 어~’로 선창 하자 너도 나도 가세하여 합창으로 바뀌었다. 끊어지면 큰일 날세라 이런저런 노래들이 줄을 이어 계속되니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 왁자할 수밖에 없다. 만추(晩秋), 경주 아니 신라의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포스코로 향하기 전 양동마을을 잠시 둘러보게 되었다. 작은 내를 끼고 들어가는 낮은 산줄기를 따라 들어선 기와와 몇몇 초옥 전통가옥들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이곳은 월성(月城) 손 씨와 여강(驪江) 이 씨의 집성마을로 직계 후손인 손O곤 동문으로부터 이 마을 형성에 얽힌 의미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약 520년 전 손소(孫昭 1433-1484)라는 분이 장인이 되는 유복하(柳復河)의 상속자로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 손 씨의 종가를 이뤄 번성하였다. 손소의 딸이 여강 이 씨 번(蕃 1463-1500)에게 출가하여 낳은 아들이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 인물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라고 한다. 이분의 덕행과 학문은 그의 서자(庶子)되는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에 의하여 전해지고 꽃 피웠기 때문에 「무잠계 무회재(無潛溪 無晦齋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도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라 한다는 손 동문의 말이다.
회재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다는 옥산서원은 그만 지나치고, 대신 회재선생이 사랑채로 짓고 몇 년간 머물렀다는 독락당(獨樂堂) 주변을 잠깐 둘러보았다. 동문들 눈빛에서도 이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