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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14)

by 김헌삼

매혹의 작은 산들




우리 국토는 70퍼센트 정도가 산악지대이나 그 산들의 높이는 모두 1천 미터 안팎이어서 특별한 산악기술이나 거추장스러운 장비 없이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원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높이도 1,500미터가 넘는 한라, 지리, 설악, 덕유 등 하루의 일정으로는 산행이 어렵거나 빠듯하게 다녀올 수 있는 몇몇 산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산들은 꾸준히 주말 산행을 일상으로 하는 사람들이 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 5백 미터 내외의 낮은 산들은 거주지 가까이 위치한다면 매일 새벽 산책 정도로 적합할까, 주말 하루를 전적으로 할애하기에는 어쩐지 미흡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높지는 않아도 하루 일정으로서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얼마든지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산들도 많이 있다.

강원도 홍천의 팔봉산(八峰山)은 정상의 높이가 302미터에 불과한 아주 자그마한 산이다. 춘천을 거쳐 홍천강 상류를 이루는 어유포리로 향한 고갯길에서 멀리 내려다봤을 때, 강을 끼고 있는 이 산의 전경(全景)은 마치 수반에 받쳐 놓은 산 모형의 수석(壽石)이었다.

산 앞쪽으로 오르기 시작하여 1봉과 2봉 사이의 안부(鞍部)까지는 한차례의 헐떡거림으로 끝난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가 깊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코스 타기가 쉽지 않다. 봉마다 특색을 갖춘 암릉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스릴과 더불어 느끼는 아기자기한 맛은 여운으로 오래 남는 것이었다.

충남 홍성의 용봉산(龍鳳山)은 장항선 열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수암산까지 길게 이어간 형상이 마치 커다란 누에 한 마리가 북쪽으로 열심히 기어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상하리 용봉국민학교를 시발로 하여 1시간가량 올라가면 380미터의 용봉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누에 등허리 같은 기나긴 능선 길을 종주하여 해발 265미터의 수암산(秀岩山)을 거쳐 덕산온천까지 완주하자면 3시간이 넘는 힘겨운 산행을 감수하여야 한다. 3백 미터 급의 산으로서 이런 곳도 있나 싶게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 마치 큰 산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산의 기나긴 길을 걸으면서 허벅지가 뻐근하도록 힘들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이들에 비하면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은 최고봉의 높이가 468미터로 약간 높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산행 기점의 해발이 ‘영(零)’에 가까워 여느 산 6,7백 미터 급에 상응하는 높이라 할 수 있다. 큰 봉우리 두 개를 잇는 능선은 모양과 크기가 각각 다른 바위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우회도 하며 줄지어 늘어선 암릉지역을 줄곧 걸어야 한다. 한쪽 편은 수십 미터의 낭떠러지여서 서두름 없이 발자취를 눈여겨보며 따라가노라면 자연 시간이 걸리며 짜릿함도 맛보게 된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바다를 끼고 있는 산이어서 접근성이 좋다. 바닷물의 반짝이는 은빛 물결, 그 위에 조는 듯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등 물씬 풍기는 해정(海情)을 함께 하는 맛이 이채롭다.

그 밖에도 경기도 소금강(小金剛)이라 스스로 자랑(자재암 일주문 뒤쪽 현판은 ‘京畿小金剛’이라는 것이다)하는 소요산(逍遙山)은 최고봉인 의상대의 높이가 536미터에 그친다. 중 백운대, 상백운대, 나한대, 의상대를 두루 거쳐 공주봉까지 부채꼴의 연봉들을 한 바퀴 돌고 나면 3시간 이상 걸리는 이상적인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교통도 전철과 기차로 연결되는 철도편, 시내 또는 직통의 버스 편 등 편리하며 도심을 빠져 교외로 벗어나는 기분을 유감없이 만끽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게 다녀올 수 있다.

산행의 베테랑이 돼가면서 낮은 산들은 점차 가는 재미가 시들해지고 높은 산을 선호하게 되는 것 아닌가 여기기 쉽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알피니스트 프랑크 스마이스는 그의 저서에서 ‘내가 납득시키고 싶은 점은 낮은 산들에 가 있더라도 나는 높은 산에 오를 때 못지않게 행복하다는 사실이다.’고 피력하였다. 물론 8천 미터 급 세계최고봉의 산들을 다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낮은 산의 기준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다른 글 속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따뜻한 공기에 실려 다니는 풀잎과 야생 백리향(百里香)의 내음은 산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들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이 냄새를 켄트의 구릉지대에서 보낸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 시절에서부터 나는 낮은 산들보다 높은 산들을 더 좋아하거나 높은 산들보다 낮은 산들을 더 좋아하는 그런 취향이 몸에 배지 않았고 그냥 산들을 사랑했으며 그냥 산을 오르거나 산속에 들어가 있고 싶어 했다.’고 술회한 것으로 미루어 산을 좋아함에 있어서 높고 낮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다.

산행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높고 험준한 산을 갈 힘과 요령이 터득되고 또 내구력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높은 산은 높은 산으로서의 웅장한 맛이 있고 낮은 산은 또 낮은 산대로의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것이다. 다만 낮은 산은 대부분 코스가 짧아 단시간에 산행이 끝나버리기 쉽다.

낮은 산을 갈 때는 연봉을 택하여 종주한다든가, 계곡과 바위가 수려한 곳을 찾아 머무르며 관조의 시간을 오래 갖는다. 또는 멀리 있는 산을 택하여, 가고 오는 차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을 함께 음미하는 등 여유 있게 즐기는 방법도 있다.

작은 산을 갈 때는 큰 산으로 향할 때와 달리 긴장감은 크게 감쇄된다. 말하자면 갑자기 기상이 바뀌는 등의 위험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낮은 산에는 급격한 변화가 닥쳐올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설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하산을 서둘러 쉽사리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낮은 산을 갈 때는 마음이 한결 가볍고 여유가 있으므로 가족, 친지, 또는 직장인이 그룹으로 하는 산행은 작은 산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날씨 좋은 날 주말이면 높지 않은 산들이 그렇게 붐비는 것일 것이다. (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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