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의 로마도시, 에페스
문명이란 사람의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여 생활이 편리하고 물질이 풍족한 상태를 말한다. 기원전 6,500년 경 중부내륙도시 콘야 북동쪽으로 50킬로 지점 차탈회윅(Catalhoyuk)이라는 곳에 세계 최초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문명의 시초 단계로 보는 것 같다. 그 후 이름도 생소한 하티 족, 히타이트, 프리지아, 우라르투, 리키아, 리디아를 비롯하여 이오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이 터키 땅 안탈리아를 거쳐 갔다. 지금 그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래서 터키란 나라 전체를 거대한 야외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이스탄불에서 이틀을 묵은 뒤 셋째 날 아침, 일찍 서둘러 국내선 아트라스항공에 탑승하여 약 1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3번째로 큰 도시 이즈미르였다. 버스를 이용하면 9시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이즈미르 멘데레스 공항에서 새로운 전용 버스에 옮겨 타고 약 80킬로를 달려 에게해의 해안도시 에페스로 가 고대문명의 유적들을 본다. 에페스(Efes)는 성서(聖書)에 에베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처음 들른 곳은 언덕 위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사도 요한교회였다. 많은 유적지 중에 유독 이곳을 찾는 것은 예수 12제자 중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만년에 이 일대에서 복음 활동을 했고, 그 무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폐허화하였지만 6세기경 유스티아누스 황제(재위 527~565)가 그를 기려 건축한 대규모 교회 터라는 기독교인이 꼭 찾고 싶어 하는 성지(聖地)이다. 햇볕은 따가워도 솔솔 불어와 스쳐 가는 바람이 시원하고 한때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 위용을 자랑했던 석재들이 지금은 부서져 아무렇게 뒹굴고 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에는 쪼아내던 석공의 열정과 정성과 땀이 어려 있음이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래쪽 멀지 않은 곳에 조각난 돌들을 주워 이어 올린 것 같은 큰 기둥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그곳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꼽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는 아르테미스 신전 자리라고 한다. 기원전 580년에 지어졌다가 기원전 35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재건 파괴가 거듭되었다. 강이 범람하며 파묻히고 지진 등으로 완전히 없어진 것을, 기둥 조각들을 주워 모아 억지로 꿰맞춘 것 같은 높이 19미터의 돌기둥 하나, 유허비(遺墟碑)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그나마라도 서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그 기둥에서 불가사의를 가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린양의 갈비를 주제로 마련된 특식 오찬을 위하여 쉬린제(Sirince)로 향한다. 에페스에서 약 10킬로, 1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지만 쉬린제는 해발 350의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산길을 가듯 구불구불 힘겹게 올라간다. 주위 산자락에는 갯버들처럼 생긴 올리브나무들이 빼곡하다. 우리가 들어간 「아르테미스 레스토랑」은 특별히 마련된 메뉴도 그렇지만 1849년에 초등학교로 쓸 계획으로 지었다는 150년도 더 되는 석조건물이 특히 맘에 든다. 주변 환경에 걸맞게 화려하지는 않으나 단순 정갈한 내부에 적절히 배열한 몇 점의 골동 소품들로 이 음식점의 소박하면서 고아한 품격을 느끼게 된다.
정원에서 둘러보는 전망 또한 좋다. 건너편 산비탈에는 고만고만한 하얀 집들이 3,40호 모여 있다. 붉은 지붕을 하고 똑같은 크기의 창들이 일렬로 있는 모습이 기차의 차창을 연상시킨다. 예전에는 그리스인들이 모여 생활하던 마을이었다. 그리스와의 전쟁 뒤 서로 적대국에 남게 된 주민들을 포로 맞바꾸듯이 교환해 지금은 그리스 테살로니크에 거주하던 터키인이 돌아와 살고 있다고 한다. 역사상 백포도주를 제일 먼저 제조한 동네라 해서 그런지 식사에 앞서 체리, 오디, 멜론 세 가지 ‘홈 메이드 와인’ 시음이 있었다. 우리는 아르테미스 신전 입구에 서 있던 몇 그루의 커다란 뽕나무를 생각하며 오디와인(Black Mulberry Wine)을 반주로 골랐다. 특히 마나님들이 맛있게 들었다니 흔히 쓰는 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배불리 먹고 오후의 태양 속을 걸으며 본 옛 로마 도시 에페스 유적지는 이날의 하이라이트이며 터키여행에서 특별히 인상에 남는 몇 군데 중 하나이다. 처음에 간 성요한 교회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풍요와 다산(多産)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 터가 있으며 여기서 큰길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면 ‘에페스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이태리 로마도 몇 차례 가보았지만 이렇게 방대한 로마 도시가 이곳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그렇게 큰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어 폐허화한 것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터키 역사를 공부한 이희수 교수는, 이곳을 모두 보려면 며칠을 걸려야 할 것이라며 20차례나 찾았는데도 아직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것이 있다고 그의 책에 썼다. 사실 지금도 발굴 작업을 하는 지역이 있었으며, 가이드에 의하면 현재 드러난 것은 10분의 1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
옛 거리와 교회, 신전과 도서관, 극장, 아고라와 스타디움, 거주지와 창고, 목욕탕과 화장실, 분수와 정원 등 이름 붙은 것도 이루 거론하기 힘든 정도인데 오후 한나절을 둘러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럼에도 본 것 중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 것과 기억되는 것, 참고자료를 통하여 알게 된 것들을 보충하여 간추려본다.
당초 에베소(에페스)는 기원전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르테미스 신전이 건설될 무렵인 기원전 600년경에 본격적인 도시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가 가장 절정에 이른 시기는 기원전 129년경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로마제국의 아시아 수도로 정해지면서부터다. 당시 로마 다음으로 손꼽히는 인구 25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도시를 크게 구획하는 대로가 3개 있고 그 길은 차도와 보행자 도로가 구분되듯이 마차 길과 인도를 나눴다. 마차 길은 바퀴가 잘 구르도록 도로 양쪽에 긴 홈을 파놓았을 뿐 아니라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 계획도시로 꾸며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규모나 완성도, 미관으로 볼 때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로 누구든지 셀시우스 도서관을 지목할 것이다. 크레테스 대로를 걸으며 내려다보면 길 막다른 곳에 군계일학처럼 우뚝 서 있어 저절로 눈길이 그쪽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2층 구조로서 전면 하단에는 4명의 여신 입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는데 각각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25년에 걸쳐 서기 135년에 완공되었으나 지진 등으로 크게 파손된 것을 1970년 복구하여 이만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한다.
에게해를 향하여 뻗어 나간 아르카디안 거리와 앞을 가로지르는 마블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 잡은 반원형 공연장은 기원전 3세기경에 처음 축조되고 그 후 로마시대에 수차 확장하여 2만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자리 차지와 건축구조가 무대와 오케스트라석에서 발하는 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객석의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들리게 되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아내는 시험 삼아 무대 쪽에 서서 그립던 손녀 이름을 불러보니 마이크 없이도 크게 울리는 느낌이다.
특별한 흥미를 끄는 곳은 수세식 공중화장실이다. 벽 밑으로 돌아가며 설치된 벤치 모양의 자리에 5,60센티 간격으로 10여 개의 변기 구멍을 뚫어놓아 배설물이 약 1미터 이상 되는 아래로 떨어지면 그 밑으로 당시 항시 흐르던 물에 씻겨나가게 되어있다. 아마도 맞춤한 그 구멍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볼일을 보며 옆 사람과 대화도 가능했을 것 같다. 당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치마처럼 생긴 긴 하의를 입었을 터이니 요처(要處)의 가림에 대하여는 괘념치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겨울철에는 찬기가 가시도록 노예들이 미리 앉아 녹여 놓았다던가?
넉넉한 시간에 일정을 끝내고 약 45킬로 거리에 ‘새들의 섬’이라는 뜻을 지닌 쿠사다시로 가 바다를 바라보는 원형극장 모양의 호텔 ‘오누라(Onura)’에 드니 해변인데도 갈매기는 눈을 비비고 봐도 없고, 유난히 많은 제비가 제 세상인 양 활개 치듯 날고 있었다. 하기는 우리 일행 중에 강남 사람은 분명히 끼었는데 부산 손님은 눈에 띄지 않더라니. 그래서일까?